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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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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양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인가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부딪친다. 9장에서 맹인을 보게 하는 표적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0장에서 예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이다. 눈을 제대로 뜨고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왜 그러한 분이 되셨는가 물어야 한다.

 

양의 문

 

양들을 위한 울타리는 높지 않다. 문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다. 양의 울타리는 양들에게 있어서 경계선이다. 그 경계선을 넘어 가지 말라는 표식이다. 양들은 낮은 울타리를 넘어 갈 능력도 없다. 단지 열린 문을 통해 드나들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다른 짐승들은 충분히 넘나들 수 있을 만큼 낮은 울타리다. 그러기에 양의 문을 통하지 않고 양의 울타리를 넘어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양을 해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0장은 절도며 강도다라고 선언한다.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문을 통해 오간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양의 문을 통해 양들이 오가며 무엇을 얻는가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성경에서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다.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문이시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요한복음 14:6에서는 직접적인 화법으로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기에 예수님 외에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양들의 생명을 해치는 자들이다. 곧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결국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절도며 강도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면서 그러기에 자신은 하나님께 양들을 인도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한다. 선하다는 의미는 살린다는 것이다. 양들을 생명으로 곧 하나님께 인도하는 목자라는 것이다. 양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베드로전서 3:18은 분명한 어조로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심이라.”

선한 목자에 대비해서 등장하는 자가 삯꾼 목자다. 곁으로는 양들을 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양들을 취하여 자신의 이득을 노리는 자들이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양을 예수님의 양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예수님의 대리인으로서 맡아 관리하는 자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양을 자신의 양인 것처럼 하는 자는 삯꾼 목자로 양을 도적질 하는 자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요한복음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양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양들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들을 빼앗아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자신의 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왜냐면 그 양들을 주신 하나님은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인데,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선언하신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칭했다고 해서 돌로 치려고 했다. 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자신을 돌로 치려고 하느냐면서 하나님과 하나인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시편 82:6의 말씀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여기에서 사람들을 신이라고 한 것은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의미이다. 다른 피조물에게 있어서 사람은 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이 되면 안된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나타나도록 해야 하는 자가 사람이다. 창세기 1:26-28에 보면 사람은 땅을 다스리는 자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러나 그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이사야 43:7은 말씀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예수님은 이제 사람을 신이라고 하는데서 어떤 사람이 신으로 불려지는가를 말씀한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10:35)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10:36)고 하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10:37-38)고 하신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양들의 구원 곧 생명을 얻는 일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물었던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신 것으로 화답한 것과 같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의 의미는 이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고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오직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님의 양들만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구원의 유일한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생명을 얻게 된다.

 

왜 양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표현한다. 왜일까? 다른 짐승들은 혼자서도 자신의 길을 안다. 닭도 혼자 있다가도 차가 오면 피하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양은 그러하지 못한다. 누군가 알려주고 인도해주어 한다. 스스로는 그 길이 절벽인지도 모르고 차가 와도 피할 줄을 모른다. 이사야 53:6에서 말씀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양은 스스로 내버려두면 잘못된 길로 갑니다. 여기에서 양같다는 말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기에 양은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야 53:6은 계속해서 말씀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자신이 어리석고 미련한 양임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3:17-18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으로 통하는 양의 문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됨을 보는 눈을 가진 자가 되라. 이러한 자가 이제 요한복음의 표적이 가지는 마지막 종착지인 11장의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4

 

표적 7 (11) : 나사로 다시 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보여주는 영생의 길을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는 연속 설교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표적은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에게 변화를 주기 위함이다고 선포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말씀이다(표적 2).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생명에의 회복)을 막고 있는 죄로부터의 변화다(표적 3). 그러기에 이러한 예수님의 오심은 양식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려 오신 것이다(표적 4).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기 때문이다(표적 5). 영적인 눈을 뜬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되시는 예수님만이 영생으로 인도하심을 믿게 된다(표적 6). 이제 요한복음은 변화의 최종 목적지를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게 되는 표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교한다.

 

죽은 나사로

 

성경은 영적으로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임을 선언한다. 에베소서 2:1은 모든 인간을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1장은 죽어가는 나사로를 낳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을 7번째 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나사로를 죽기 전에 낳게 하신 것을 거부하시고 나사로가 완전히 죽어버린 후에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나아가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죽음은 잠자는 상태와 같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도다”(요한계시록 14:13)하신 이유는 믿는 자들은 인간의 수고를 마치고 잠자리에서 편히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예수님의 죽으심을 고린도전서 15:2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러나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의미는 아직 죽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14)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갔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4일째였다.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있었다. 죽은 시체의 냄새가 있었다. 죽은 시체는 당연히 썩은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인간의 모습은 죽은 시체의 냄새를 풍긴다. 이를 이사야 1:5-6에서는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하셨으면 눈물을 보이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의 타락을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너무나 기뻐서 하늘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선포하고 있을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16은 이렇게 나타났다고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나사로가 죽은 거기에 예수님이 마침내 오셨다. 예수님을 마중 나온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 부활이요 []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 죽을지라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부활과 생명에는 정관사가 붙어있다. 예수님은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시다. 곧 예수님만이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밝혀 선언한다. 예수님 안에만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그리고 죽어도의 정확한 번역은 죽을지라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을지라도 산다의 의미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마르다도 나사로가 육신적으로 죽기 전에 오셨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사로가 이미 죽었으니 끝났다는 이야기다. 물론 나사로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말한다. 곧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나사로의 부활을 믿는다고 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고 의문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 시 믿는 자들의 육체 부활을 사실로서 선언하고 있는 곳이 고린도전서 15장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장에서 강조하는 바는 영적 부활에 관한 것이다. 마르다도 마지막 날의 부활을 안다고 했다. 요한복음은 표적의 결과인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적의 의미를 믿으라고 한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육적으로 다시 살아난 사건을 기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육신적으로 죽을지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육적으로 죽을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믿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될 것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적으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다.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에서 표적이 보여주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다. 이는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변화을 가져온다. 그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 보여주는 창조였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 완전히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능케 한다.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선포된다. 여기에 믿음이 요구된다.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은 믿음을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받아들인다의탁한다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 말씀을 믿는 자는 말씀대로 움직인다. 야고보서 2:26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움직인다. 믿고 무덤의 문인 돌을 굴러 치우고 시체인 나사로조차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사로에게 동여진 세마포를 풀어 다니게 했다.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다. 내가 예수님에게 바라는 소원의 표출이 믿음이 아니다. 그건 단지 나의 소원이고 기대일 뿐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이다. 말씀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지 믿음이란 단어로 포장된 하나님께 대한 나의 기대가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나의 구원의 확실함이 성경이 믿으면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나는 구원받았다는 나의 느낌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나사로는 다시 살았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표적이 보여주는 목적지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가진다이다. 이를 믿음으로 반응하라고 설교한다.

 

이제 나사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모든 표적의 과정을 보여주셨다. 영생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일을 이제 예수님은 하시게 된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음모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마지막 말씀들이 어울려지면서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8번째 표적이 일어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5

 

표적의 의미 읽기 / 요한복음 11:45-11

 

요한복음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 중에서 일곱 표적을 들어 그 표적의 의미를 읽어내라고 한다. 우리는 7가지 표적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첫 번째 유월절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성전청결사건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 그러나 예수님은 무너진 성전을 3일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다(2:19).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표적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다. 이를 요한복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표적의 과정은 구원의 변화다(가난혼인잔치의 표적1). 이러한 구원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왕의 신하 표적2).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으로부터 시작한다(38년된 병자 표적3). 구원은 육의 양식을 채워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곧 생명으로 채워져야 한다(오병이어 표적4). 태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신다. 그리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표적5). 자신들의 지식과 전통 그리고 논리에 젖어있는 자들은 표적에 숨겨있는 의미를 결코 읽어내지 못한다. 진정 볼 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도 같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눈을 떠 예수님을 본다(표적6). 그리고 구원의 목적지인 생명으로 표적은 인도해 간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표적7). 그렇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표적들을 통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영적 죽음)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생명으로의 구원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눈에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명에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보이는 것으로 믿지 말고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생명을 믿으라고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다.

7번째 표적인 나사로의 부활로 인해 이제 이러한 표적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때가 되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해서 예수님을 잡으라고 명령했다(11:57) 왜냐면 나사로의 부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확산은 관리들에게도 번져나갔는데 단지 관리들은 유대인의 사회에서 축출당할까 두려워하여 드러내고 믿는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이들의 믿음은 아주 취약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눈에 보여진 기적 때문에 믿었기에 눈에 보이는 기적이 더 이상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예수님으로부터 돌아 설 준비가 되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이 힘없이 붙잡히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자들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기도 하였다.

상당히 긴박한 상황에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죽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이때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째 유월절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의 유월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3년 반일거라고 유추되었다. 이 긴박한 상황은 요한복음 11:35-5712장에서 읽혀진다.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들을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11:50)

 

당연히 이 말은 예수님을 죽일 구실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이 왜 죽었는가를 웅변적으로 전달해 준다. 제사장들의 수장인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영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열에 따라 돌아가면서 하였다. 그래서 대제사장을 지낸 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들 대제사장 그룹과 바리새인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이 유대인들의 공회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 해의 대제사장이 공회의 의장을 맡고 있었다. 가야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해의 대제상이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을 구실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했던 의미로 믿는 자들에게는 이해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 1:21)를 증언하는 말이 되어진 것이다.

 

마리아의 향유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12:7)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다니라는 동네에 있었다. 마태나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이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 그 첫 번째 반응이 예수님을 팔게 되는 가롯 유다의 반응이었다. 가롯 유다의 반응은 아주 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가롯 유다는 회계를 담당했던 자였다. 요한복음은 가롯 유다가 돈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한 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300데나리온이 쓰였다면 아주 유용한 쓰임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300데나리온이 상당한 액수의 돈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달랐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받아들이기 힘든 반응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볼 때는 마리아가 행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는 행위였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마태나 마가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의 행위도 전달되어 기억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이 여인의 행위가 기억될 것이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가지는 의미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오직 하난 예수님의 죽으심은 반드시 기념하여 지키라고 명하셨다(누가복음 22:19-20).

예수님은 덧붙여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8) 이런 의미에서 가롯 유다의 반응은 잘못되었다. 가난한 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한 그리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원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필요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고 중요한 것이 필요한 것 보다 먼저인 것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리 남을 구제하여도 결국은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구제가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나사로까지 죽일 음모

예수님만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지 죽일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왜냐면 사람들은 다신 산 나사로를 보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관심은 나사로였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 자신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병이 낳는 것이었고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사로가 정말 다시 산 것인가에 있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의 결과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임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후 성경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엄청난 사건의 주인공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사도행전에도 전혀 나사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나사로가 그 음모로 죽임을 당했는지 아니면 계속 살아서 복음 전파의 일꾼이 되어서 순교를 했는지 기록 자체가 없다. 순교사의 기록으로도 찾아지지 않는다. 왜 나사로의 기록은 더 이상 발견이 되지 않는가? 나사로 사건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사로의 죽고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 간증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내용이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간증을 했는데 듣는 사람들의 기억에는 예수님은 없고 간증자만 남는다. 이는 잘못된 간증이다. 진정한 간증은 간증자는 사라지고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이 남아야 한다. 이것이 진짜 간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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