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3

 

다운로드.jpg


지켜줌을 위한 기도 : 17(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이다. 이 기도는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1)자신을 위한 기도(1-5) -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기도 (2)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켜달라는 기도 (3)믿는 자 모두를 위한 기도(20-26) -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를 하나로 연결한다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제자들을 통하여 세상에 복음이 전해질 때 세상이 이를 믿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관계된 기도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핵심단어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에 복을 전해야 하는 제자들의 보전을 위하여, 믿는 자들의 하나됨을 위하여이다. 이번에는 그 두 번째 제자들의 보전을 위한 기도이다.

내게 주신 자들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3가지가 있다. (1)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을 (2)아버지의 이름으로 (3)보전(지켜)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 곧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는 자들이다. 이를 6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일단 그들은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이다. 12절에 의하면 가롯 유다(멸망의 자식)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이다. 11명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은 세상을 향해 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지금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모든 믿는 자들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며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단순히 내게 온 자들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로 표현한다. 이들은 이미 아버지의 것 곧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한다(6). 곧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자 한 자들이라는 의미다. 이들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나타났다(6)는 것은 제자들을 통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에 선포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믿는 자들을 통해 세상에 선포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하나님)가 내(예수님)게 주신 자들이란 예수님의 선언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는 이러해야 함을 동시에 선언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가 믿게 된다고 그 자를 내가 믿게했다고 자랑할 수 없게 만드는 장면이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 믿게 되었다면 그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자 한 자이고 하나님이 그 자를 내게 주셔서 내가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11절과 12절에 보면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이라는 번역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이다. ‘내게 주신이 수식하고 있는 부분은 그들이지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예수님이 반복하여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들을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자랑치 않게 하고 오히려 복음의 결실을 맺게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고 있다.

아버의 이름으로

 

두 번째 반복되는 표현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를 찾아내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내 이름을 걸고 말하지만’ ‘우리 집안의 명예를 걸고 하는 것이다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여l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이름이다. 곧 여기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11절에 보면 거룩하신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거룩하신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 특히 구약을 알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거룩이 가지는 의미는 구별이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다르시다. 이것은 성경의 첫 구절 창세기 1:1에부터 선언된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포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해 놓고 시작한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더라도 모든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이다. 예수님은 내게 주신 자들을 창조주로서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으로 변역된 엘로힘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엘로힘 하나님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풍겨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시고 신실하신 자의 모습이다. 17:20이하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이유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제자들을 지켜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하고 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로 인하여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인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에서 스스로 지켜낼 힘이 없다. 제자들이 세상에 굴복하면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도 없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는 기도의 결론은 제자들을 지켜달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하늘로 갈 것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시고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럼으로 예수님도 계속해서 함께 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3년 반이라는 시간들을 제자들은 육신적으로 함께 했던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18절에 보면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는 예수님의 마음을 마태복음 10:16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마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제자들의 복음전파로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복음전파로 믿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복음전파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핍박이다. 아니면 타협의 손길이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고 그들이 전할 말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세상은 그들을 박해 할 것이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제자들은 이미 진리로 거룩하게 되었다. 이를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고 선언한다. 곧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자들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속한 곳이 다르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지켜달라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박해나 타협에 굴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기쁨이 그들에게 충만해야 한다. 13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당연히 여기에서 말하는 기쁨은 구원받음의 기쁨이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함의 기쁨이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한다면 영생을 얻음의 기쁨이다. 그 기쁨은 세상이 갖는 기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가져야 하는 기쁨은 내 기쁨이라고 선언한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가? 그것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자 함이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구원받음의 기쁨이 충만하지 않고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이 아닌 하나님나라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단순히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산다는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세상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마시라.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지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Don't worry be happy!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4

 

하나됨을 위한 기도 : 17(3)

 

요한복음 17장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영생의 복음을 선포함이다. 예수님은 인간구원을 사람이 되셨고 이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루신 영생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세상은 복음의 증인들을 핍박할 것이다. 이에 예수님을 이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이제 3번째 기도이다. 그것은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인하여 믿게 될 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하나됨의 바른 이해

 

요한복음 17장은 하나님의 인간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위한 기도이다. 그렇게 됨으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이루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구원을 위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제자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11).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제자들을 통해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하나됨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이제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믿게 될 자들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반복해서 기도하신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이를 몇 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뜻이 온전히 선포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신다.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17:3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와 헤롯 왕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으로 등극하게 될 메시야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으로 멀어진 인간, 그래서 영원 지옥을 향하여 가게 된 인간에게 영생을 주고자 예수님은 오셨다. 쉽게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제자들도 왜 예수님이 오셨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마침내 성령 하나님이 임하자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나를 알게 되었다. 제자들은 마침내 하나가 된 것이다. 성질이 급하든지 조용하든지 불같든지 온화하든지 관계없이 그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는 아는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를 믿으라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졌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는 길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믿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외에는 구원받을 길을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이러한 의미에서 저들로 하나되게 하옵소서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아버지가 내게 주신 영광을 앞으로 믿을 자들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구원의 뜻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어 물질적으로 풍성해 지고 육신적으로 건강해지며 자녀들이 잘 살게 하면 정말 좋겠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부귀영화를 오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느냐이다. 줄여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어디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왜 이 땅에 보내셨는가를 아는데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요한삼서 1:2에 보면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을 보고 보아라 이 땅에 물질적으로도 잘되고 건강해야 믿음이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반드시 그리되어야 할 것(must)와 그렇게 되었으면 좋은 것(want)을 분명히 구분해 놓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must보다는 want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오직 하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데 하나 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하박국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구원받음의 기쁨이 사라질 때 신앙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설사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해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의 하나됨이 요한복음 17장의 하나됨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뜻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아는데 하나되게 해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라도 아끼지 않고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마태복음 5:6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고 했는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무엇에 배부르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마태복음 팔복에 있어서 인간의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배부른 자가 비로소 인간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나만을 바라보는 삶에서 남을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왜 우리는 감사는 하는데 인간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배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친구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잘나가던 자가 예수님을 믿고 나더니 복음을 전하다가 얻어맞기도 하고 죽을 상황에 처하지를 않나, 돈이 없어서 쩔쩔매지를 않나, 친구들은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14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단순히 감사하는 것으로는 결코 변화지 않는다. 그러나 풍성한 사랑의 감격은 나를 바꾼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데에 곧 예수님을 믿는 일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오직 구원받기 위해서임을 아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음을 아는 일에 하나가 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5

 

진리가 무엇이냐? : 18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 중에서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그 표적들의 의미로 8번째 표적으로 마무리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요한복음 18장은 예수님이 잡히시고 심문을 당하신 이야기다. 18장의 중심에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이 있다.

 

진리의 의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질문에 말로서 답변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러한 무언의 답변이 있다. “이제 내가 행하는 일을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14:6에서 진리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사는 길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잠시 잘 사는 길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바로 죄인된 인간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쉽게 말하면 인간 구원을 위해 오셨다.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말하면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결국은 지옥으로 가게 되는 길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야 말로 진리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잡히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혀 가신 것이다.

 

내가 왕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자기 선언이 7번 나온다. 7가지 자기 선언의 절정이 8번째 자기 선언 나는 왕이다로 나타난다. 로마서 10:9에 보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예수님의 왕되심이 함께 고백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 고백이고 거짓 믿음이다.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다. 이에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물러서며 땅에 엎드려 진다. 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히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히신 것이다. 제자들은 그냥 보내줄 것을 말하면서 제자들을 지키신 예수님의 모습도 보여준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빌라도가 예수 너는 왕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왕이다고 자기 선언을 하신다. 그러나 자신은 이 세상의 왕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다. 곧 진리에 속한 자들의 왕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왕이신 예수님이 바로 진리 그 자체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길 곧 생명의 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잡히셨다. 베드로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넣으라 하시며 자신이 이제는 영생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아버지가 주시는 쓴 잔 곧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고 선언하신다. 그렇게 예수님은 왕이 되심을 선포하신다. 빌립보서 2:8-11을 보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당당함과 베드로의 부인

 

잡히신 예수님은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신다. 이때 베드로가 어찌되나 하고 대제사장의 집 문 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다. 죄인처럼 끌려 온 예수님의 모습과 베드로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지 교차적으로 18장은 잘 보여 주고 있다.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과 아직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그냥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예수님이 끌려가신 현장에 따라갔던 베드로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고 없고 차이는 이렇게 분명히 다르게 나타난다. 다르게 표현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당당함이 아니라 두려움이 먼저 찾아온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이 어떠한 경우에도 함께 하여주신다는 확신이다. 구원의 기쁨은 죽음조차도 어찌 하지 못한다. 베드로가 성령의 임함과 함께 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했는지를 알게 되고 자신의 구원이 확신을 가지게 되자 죽음도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베드로는 훗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던 이 날의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이 왜 스스로 잡혀 가셔야 했는지 알 수 없었고 두려움 가운데 대제사장의 문 밖에 있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그동안 가르친 것들을 물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들키지 않게 숨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가르쳐 왔음을 상기시켰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역시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어차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명분 만들기임을 아시기에 그들의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던 자들은 종들이었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예수님을 맹세하며 저주하면서 부인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잡혀갔기에 이미 베드로는 망연자실 그것이었다. 이는 오직 베드로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랐던 모두가 그러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의 복된 삶을 원하는 자들에게도 나타난다. 왜 예수님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삶의 현장에서 가지지 않으면 누구나 베드로와 같이 된다.

 

빌라도와의 대화

 

안나스에게서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끌려갔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데려온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하며 넘긴다. 왜냐면 단지 종교적인 이유로는 로마법에 의해 사형을 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자신이 가진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을 수 있다는 언질을 받기도 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한다. 참으로 비겁한 자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비겁함을 폭로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의외로 예수님은 빌라도와는 대화를 나눈다. 요한복음에는 중요한 대화 3가지가 나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수가동네 여인과의 대화 그리고 빌라도와의 대화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는 하나님나라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수가동네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왕으로서의 자기 선언이 나온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선언이다. “내가 왕이니라요한복음은 20:28에서 도마의 입을 통해 실제적인 결론을 내린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6

 

예수님의 죽음 - 19(1)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사형을 선고했다. 빌라도가 그리했던 것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외침이 결정적이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 예수님은 빌라도가 아닌 유대인들의 죄를 언급한다. “나를 네(빌라도)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11) 왜 그러한가?

 

너희 왕이로다

 

(1)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줄 때는 예수님을 행악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18:30). 여기에서 행악자라고 함은 로마에 대항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로마에 항거하는 행악자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 주고자 했다. 이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넘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유대 법에 따르면 예수님은 죽을 죄를 범했는데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7). 이는 로마법에 따르면 전혀 죄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고 했다고 말을 바꾼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한 자라는 것이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느낌을 가지고 선언한다. 여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답한 말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하는 선언이다.

 

(2)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로 여겼다. 물론 정치적인 왕이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삶의 실제적인 왕은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정치적인 왕은 실제적인 왕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대리인이었고 또한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였다. 사사기 8:23에 보면 300명의 용사로 유명한 기드온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설사 현재 로마의 통치 아래 있다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유대인들은 오직 가이사만이 자신들의 왕임을 선언하고 있다. 왕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3)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통했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결론은 도마의 고백으로 끝난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주님 곧 왕이시라는 고백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왕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자신을 넘긴 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하고 있다.

 

현실에 굴복한 빌라도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빌라도는 참으로 비겁한 행동으로 일관한다. 이러한 빌라도의 비겁함은 현실의 두려움에 기인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을 알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고 풀어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 타협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하게 된다. 진실과 현실의 당면한 문제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이 빌라도로 하여금 여러 행동을 하게 한다. 일차적으로는 바라바라는 강도와 예수님 누구를 놓아주시를 원하느냐고 유대인들이 선택하게 함으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두 번째 시도를 하게 하는데 채찍질하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어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으니 이정도에서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유대인들 계속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진짜 이유를 듣게 된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신들의 존재를 실제로 믿었던 시대였다. 물론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이었고 다양한 신들이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에서 경외감마저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혹시 예수님을 잘못 다루었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었다면서 예수님의 일에 상관도 하지 말라(마태복음 27:19)는 소리를 들었으니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세 번째 시도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죄가 없음을 변호하기를 원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을 놓아줄 권한이 자기에게 있음을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나를 해할 수 없다고 답하면서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 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 주고자 함을 간파하고 빌라도를 현실적인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협박한다.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주면 가이사에게 반역을 하는 것이라고. 여기에 빌라도는 현실의 벽 앞에 굴복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세 번째 시도도 실패하고 만다. 빌라도는 진리라 무엇이냐고 관심이 보였던 그 진리를 외면하고 만다. 진실이 현실의 상황 앞에 굴복한 것이다.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선고한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예수님과 부딪힌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자들로는 세 그룹이 있었다. 사두개인이라고 불리우는 제사장 그룹과 민간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바리새인 그리고 성경박사로 일컬어지던 서기관들이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많이 부딪혔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받았던 존경과 위엄이 땅으로 추락할 기세였다. 아예 그들을 화있을진저라고 했으니 얼마나 예수님에게 대하여 분개했겠는가? 서기관들 역시 바리새인들의 범주에 똑같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 그룹은 다른 의미에서 위기에 봉착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이권개입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엎으면서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제사장들의 이권을 챙기는 장소가 됨을 한탄하신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자 하나님을 모욕했다 해서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얻게 된다.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다. 빌라도는 이러한 이유가 로마법에 접촉이 되지 않으니 유대인들의 법대로 처리하라고 했으나 그들은 법적으로 하자 없이 사형에 처한 것으로 처리하고 싶어 했다. 특히 이 일에 대제사장 그룹들이 앞장을 섰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모순된 행위를 하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으로 하나님 모욕죄로 죽이고자 하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가이사만이 자신들이 왕이라고 선언함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고는 실제로 자신들을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여기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이 드러난다.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거북스런 존재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비겁함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을 내버려 두셨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신 인간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예수님 자신에 주어진 고통의 잔이 아무리 쓰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일 곧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셨던 것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7

 

예수님의 죽음 - 19(2)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표적들이 보여주는 의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이다. 7번째 표적은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어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적으로 죽은 모든 인류를 대변하고 있다. 에베소서 2:1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를 대신 지시고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다 이루었다(30)

 

예수님의 죽으심의 절정이 바로 다 이루셨다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의미다. 베드로전서 3:18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제사예배는 종언을 고했다. 신약의 예배는 구원받음의 기쁨을 안고 예배하는 잔치의 성격을 가진다. 성만찬은 엄숙할 필요가 없다. 다시 한번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다는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다. 요한복음은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을 기록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럼 어떻게 다 이루었는가?

 

유대인의 왕(19,20)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T,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그냥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다. 그것도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세 언어로 썼다. 그렇게 예수님은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이란 개념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로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왕으로서 인류의 죄를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두 죄인과 함께(18)

 

예수님은 두 죄인과 함께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죄인으로 취급받아 십자가를 지셨다.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에 대항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도구였다. 그렇게 예수님은 로마에 항거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다. 그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 태어난다. 단순히 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다룬다. 물론 십계명을 중심한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어긴 것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의 옷은 벗기어졌다. 벌거벗긴 채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렸다. 그것은 수치다. 로마 병정들은 그 옷을 취하여 나누어 가졌다. 희롱이다. 공개적인 수치와 희롱 그것이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해야 할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

 

새로운 관계(26,27)

 

아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십자가 밑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제자 요한이 있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마리아가 어머니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마리아의 친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된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고 하셨다. 새로운 관계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서 새로운 가족이 되는 것이다.

 

내가 목마르다(28)

 

예수님은 전 인류의 대표자()로 십자가에 달렸음을 기억하자. 로마서 5:12-21에 보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또 한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어졌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5:45에서는 첫 사람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전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목마름은 인류의 목마름을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동네 여인과의 대화는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목마른 자에 초청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17)

 

영혼이 떠나가시다(30)

 

마침내 예수님이 숨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영혼이 떠나가다에서 떠나가다의 본래 의미는 넘겨주다이다. 문법에 의거하여 번역하면 (예수님)가 영을 넘겨주다이다. 그럼 누구에게 넘겨주었는가? 누가복음 23:46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죽음은 단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과 분리되어 어딘가에 넘겨지는 것이다. 믿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손에 넘겨진다. 곧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넘겨진다.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 육은 부활 할 것이다. 그리고 육과 영이 다시 결합하여 영화된 몸으로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육과 영이 결합된 몸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지게 된다는 것이 성경이 알려준다.

 

부자의 무덤에

안식일 곧 금요일 해가 지기 전에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죽음이 확인되고 처리되어야 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죄인은 다리가 꺽여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주었기에 다리를 꺽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 군인이 예수님의 엎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나온 것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것을 자세히 기록함은 예수님은 확실히 죽었음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분명히 죽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다 곧 부활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성경 구절이 이사야 53:9에 나온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악인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했으나 시체는 부자의 무덤에 있게 되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자신의 무덤에 안치시켰던 것이다. 그는 부자였다.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서머나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을 보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요한계시록 2:9) 예수님은 실제로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의미가 되었다. 예수님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하더래도 또는 궁핍하게 된다 하더래도 이미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부함을 누리는 자이다.

 

십자가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 그것은 인간구원의 역사가 다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다. 인간의 죄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고 인간에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읽기 38

 

예수님의 부활 - 20(1)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향하고 있었다. 요한복음 2:19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2:21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대로 성전되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죽음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표적이 아니다. 부활하심으로 표적을 완성하셨다. 가나혼인잔치에서의 첫 번째 표적은 변화였다. 그 변화는 7번째 표적인 나사로 사건에서 보여준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실제적인 결론이다. 요한복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부활이라는 표적이었다. 요한복음의 모든 표적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귀결되었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보다라는 단어이다. 20장에는 3 종류의 보다라는 동사가 등장한다.

 

(1) 안식 후 첫날 곧 한 주간의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린다. 베드로와 요한(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는데 요한이 먼저 달려가 무덤에는 들어가지 않고 구부려 무덤 속에 있는 세마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 보다는 눈에 보여져서 본 것이다. 그냥 보인 것이다.

(2)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을 자세히 살피면서 보았다. 여기에서 보다는 생각하면서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는 것을 말한다. 경험적인 앎이다. 이것은 뭐지 하는 질문을 마음속에서 물어보면서 보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2:23 “많은 사람이 그(예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에도 나온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실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경이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2: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은 것이 아니라 표적 그 자체를 보고서 믿은 것이다. 이들은 그러한 표적이 계속해서 보여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떠날 자들이었다. 실제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 삼고자 하였으나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어렵도다 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3)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간 것을 보자 요한도 무덤에 들어가 무덤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서 믿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관찰하여 본 것을 넘어서서 그 상항을 인식하면서 본 것을 의미한다. 아마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 것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무덤에 예수님은 없고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그의 하신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음을 믿었다. 이 단어는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할 때 쓰인 단어이다. 그리고 20:29에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에도 쓰인 단어다. 이 단어는 보는 것 같이 안다는 의미를 가진다. 당연히 3번째의 보다가 참 믿음을 가져 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보는 것처럼 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그런데 눈에 보고서야 인식하고(알고) 믿는 자가 되지 말고 성경 말씀을 듣고서도 인식하여 믿는 자가 복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제자들은 직접 눈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고 또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보는 것처럼 알고 믿어야 된다.

 

나를 만지지 말라

 

베드로와 요한은 이내 무덤을 떠나갔으나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인지하지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 밖에 있었다. 무덤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무덤 안에는 있는 두 천사를 보았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우는냐고 묻는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운다고 말한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 뒤편에 서서 똑같은 질문을 한다. 왜 우는가? 누구를 찾는가? 마리아는 뒤 돌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다. 여기에서 사용된 보다는 두 번째의 의미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세히 흩어보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동산지기인줄 만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면 마리아 자신이 가져가겠노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자신의 몸을 만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자신이 사람이 되어서 인간 구원의 일을 다 마쳤으므로 더 이상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자 함이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붙잡지 말라는 의미이다. 아직은 아버지께 곧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으나 머지않아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신은 떠나지만 성령이 함께 할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마리아는 이를 제자들에게 전한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저녁에 두려움에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가롯 유다는 자살하여 죽었고 또한 도마는 없었다. 그렇다고 단지 10명의 제자만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몇 명이 있었는지 모른다. 제자라고 하면 일단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이지만 복음서에서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도 제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유대인들이 나누던 인사로 먼저 말씀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두려움에 두려움이 겹친 그들에게 평강으로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평강이란 단어는 평안하다의 의미가 아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더 이상 불안에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다. 이에 제자들은 이를 보고 기뻐한다. 여기에 쓰인 보다는 세 번째 의미의 보다이다.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음을 인식 곧 알라는 것이고 아울러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음을 알라는 것이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죽었으나 부활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자들은 아직 확실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는 몰랐지만 예수님이 분명히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것만은 인식하였다. 그래서 3번째 의미의 보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리고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이상 갈등하지 말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도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당황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에 예수님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복음전파의 사명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분명히 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이 임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은 숨을 내 쉬어야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주의 할 것이 있다. 이때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다. 이는 앞으로 제자들이 취할 내용이다.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려야 했고 성령를 받아야 한다. 앞으로의 일이다. 복음을 전하는데 더 이상 갈등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는 성령이 필요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가 사하여 질 것이며 복음을 거절하는 자는 죄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누가 알겠는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예수님을 결코 믿을 수 없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졌다.



김성철목사의 요한읽기 39

 

요한복음의 결론 - 20(2)

 

요한복음의 결론은 20:28-29이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선언하신 사건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그리고 만져봄으로 확인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없었다. 도마는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확인해야만 믿겠노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은 왜 이러한 도마의 의심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확인시키기 위해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살아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도마는 직접 손을 넣어서 예수님의 죽었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았음을 보고자 한 것이다. 도마 앞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을 넣어 확인하라고 명하신다. 도마는 예수님은 분명히 죽으셨고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다고 선언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눈으로 직접 본 자들을 열거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과 비견할만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부활 역시 더 이상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오직 성경 말씀이 선포한 것을 듣고 믿을 뿐이다. 이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 가운데 7 표적들만을 기록하고 있다. 이 표적들은 눈에 보여진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여지는 것만을 믿었다. 왜 예수님이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셨는지의 의미는 살피지 않았다. 눈으로 보여지지 않으면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의미를 살펴보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십자가 밑에서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도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말로만 전해진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눈으로 보도록 할 수는 없다. 오직 사도 요한의 증언만을 듣고 믿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 해보자. ‘도마야 너는 그나마 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도마 너가 증언만을 듣고 믿어야 한다. 오직 말씀만을 듣고 믿는다면 그는 참으로 복된 자이다.’

도마의 신앙고백

 

예수님에 대한 도마의 신앙고백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는 요한복음의 결론이다. 단순이 예수님이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의 고백이다. 로마서 10:9은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는가에 대한 구절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한 죄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되심으로의 회복이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다시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순히 마음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의 시인이다. 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 우리로 부활의 소망을 주신 이는 누구인가? 역시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렇게 사람이 되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 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도마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러한 고백의 결론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주님이시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로 영원한 삶의 길로 인도한다.

 

20:30-31을 통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말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들을 통하여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자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되심의 선언이다. 곧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믿으라는 것이 그 첫째요, 두 번째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보다 정확히 번역하면 예수님 이름 안에서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 뜻한다.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님 안에서만이 영생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예수님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게 된다.

 

부활의 신앙

 

기독교는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자신만의 부활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를 성경은 강조하는가? 로마서 10:9에 보면 하나님이 그(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하셨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우리 역시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우리 역시 예수님 안에서 함께 부활했음을 선언한다. 베드로전서 3:18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그렇게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산 자가 된 것을 믿으면 이미 구원 곧 영생이 주어졌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그래서 복음이다. 내가 얻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그리하심으로 내가 예수님 안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일차적으로 부활한다. 곧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인과 종과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를 영적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더 놀라운 부활은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육신적으로도 부활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누구나 육신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육신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부활한 육신은 다시 영과 결합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5:20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곧 하나님되심을 선언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부활함으로 영생을 얻게 됨을 선언하고 있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0

 

사람 낚는 어부 - 요한복음 21(1)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는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으로 마무리 한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면서 주신 사명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아버지께서 나을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번이나 보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뜻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목적을 상실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보여주시고는 곧 사라지셨다.

주목할 이름이 있다. 베드로의 이름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새롭게 지어준 이름이다. 베드로 이전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21:15까지 시몬 베드로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시몬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17절 이후에서는 시몬은 사라지고 베드로란 이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아직 자신의 사명을 알지 못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기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시몬 베드로는 원래 자신의 일이었던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 6명도 이에 동조한다. 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주어지기 전 1-14절까지 예수님의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상기시키신다.

 

기억

 

요한복음 21장에서 어부였던 시몬을 불러 제자 삼으시고 이름을 베드로로 명명하신 장면을 제자들에게 기억나게 한다.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배에 앉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동료들과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던 그들에게 갈릴리 호수 깊은 곳에 가서 그믈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았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 왜냐면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는 자신들은 전문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무시할 수 없어서 그물을 바다에 던졌던 것인데 놀랍게도 많은 고기를 잡은 것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 4:19)고 하셨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한다. 그 말씀대로 하니 고기가 그물 가득히 잡혔는데 153마리가 잡혔다고 했다. 153마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당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던 어부들은 잡은 고기를 새어보았다. 그렇게 잡힌 고기의 수일뿐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준 또 하나의 표적을 본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 장면을 통해 처음 자신들을 제자로 불렀던 그때를 기억해 냈다.

 

사명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이다. 요한은 그때의 일을 먼저 기억해 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외친다. “주님이시다이에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허겁지겁 물속으로 뛰어내려 예수님께 온다. 이러한 표적을 보여줄 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똑같은 일을 경험했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 중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맞는 표적들만 골라 기록하고 있다. 단지 보여진 기적의 사건만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 표적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다. 예수님은 똑같은 표적을 또 한 번 제자들이 경험케 함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의 뜻을 알리고자 함이다. 그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님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은 어떤 복음서보다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무려 5장을 할애하고 있다.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장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사명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이 왜 자신들을 제자로 부르셨는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15장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고 명하신다. 복음전파의 사명은 성령님이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이 핍박이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 붙어 있었다. 왜냐면 복음전파는 곧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포도나무되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는 전 세계에서 열렸다. 사도행전은 핍박과 함께 번지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17장에서 제자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타나시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다는 단어를 세 번 기록하고 있다. 1절에 두 번, 14절에 한 번. 헌데 나타내다라는 단어가 1장에 등장하는 빛을 비추다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그냥 나타나 자신이 살았음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을 빛으로 그들에게 비추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장에서 예수님은 어둠 가운데 빛으로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선언한다. 빛이 세상에 비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빛은 어둠을 밝혀 사람들로 가야할 길을 바로 가도록 하는 데 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제자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다. 그들이 세상에 비추어야 할 빛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 남아 있지 않았다. 죽었으나 다시 산 자이다.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21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 선언했다. 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나기 위함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복음 20:31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이 부활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나타나셨다. 당연히 제자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인지시키기 위해 나타나셨다. 처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는 흔들리지 말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고는 사라지셨다.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는 예수님의 부활에 의심을 품었던 도마에게 자신이 분명히 죽었던 자로서 부활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세 번째 나타나셨다. 육체적으로 분명히 확실히 다시 살아나셨음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불어 음식을 잡수신다. 고기를 잠아 육지에 이르니 이미 예수님은 숯불 위에 생선이 구워져 가고 빵도 있었다. 제자들이 잡은 고기를 더 가져오게 하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신다. 단순히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부활하셨다. 기독교 부활의 소망은 육과 영이 결합된 온전한 몸으로서의 부활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바로 육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말씀하고 있다. 제자들이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다. 죽으나 다시 산다. 이미 죽었던 자들도 예수님의 재림시 육신의 부활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육신적으로도 분명히 부활했음을 보여주셨다.

 f81d7c91adf6fc392056b077747a6b29.jpg



  1. [권혁승 목사]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정

    [권혁승 목사]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가정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헛되도다”(시 127:1)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였다. ...
    Date2018.03.22 Bykim
    Read More
  2. [정홍기 목사] 회개의 좁은문으로 들어가게 한다

      정홍기 목사 (Shadrach H. Jung) 오클라호마 한인제일침례교회 (Oklahoma Korean First Baptist Church)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오늘 새벽까지 목회자로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감사드리며 자부심을 느끼며 뿌듯한 기쁨을 가졌다, 그런데 새벽 기도회 ...
    Date2018.03.22 Bywgma
    Read More
  3.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0-12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0  노아의 방주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
    Date2018.03.19 Bywgma
    Read More
  4. [신귀철목사] 어번아름다운교회 담임목사

                             어번 아름다운교회 신귀철(Paul Shin) 담임목사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로마의 역사가 수에니토스(Suenitos)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는 거짓이라곤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Date2018.03.19 Bywgma
    Read More
  5. 그러든지 말든지-조인 목사

    그러든지 말든지 (2018.1.28. 조인 목사) 해마다 연말이 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라인 사전들이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데, 그 단어를 보면 그 한 해 동안 가장 주목받은 사건이나 현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
    Date2018.01.28 Bywgma
    Read More
  6. 한국교회 설명서] 반기독교 세력의 용어 전술

    한국교회 설명서] 반기독교 세력의 용어 전술 <!-- 기사 내용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용어 중엔 잘못된 게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개독교’입니다. 이단과 반기독교 세력이 한국교회를 욕할 때 자주 쓰는 말인데, 비방 목적이 농후합니다. 그들은 왜 ‘...
    Date2018.01.28 Bywgma
    Read More
  7. 1월 넷째 주 목양 칼럼- 소강석 목사

    1월 넷째 주 목양 칼럼입니다. 『나가사키의 침묵』 저는 지난 주 총회 SCE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 일본 나가사키에 다녀왔습니다. 나가사키는 일찍이 1500년대에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비교적 선교가 잘 되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전통적인 가톨...
    Date2018.01.27 Bywgma
    Read More
  8. [권혁승 목사] 신앙교육의 산실, [베이트 아브] 구약시대의 가정 아버지의 집 이해(7)

    [권혁승 목사] 신앙교육의 산실인 "베이트 아브" 구약시대의 가정 “아버지의 집” 이해(7)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
    Date2018.01.18 Bykim
    Read More
  9.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4 - 기독교와 종교 5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4   아담의 실패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
    Date2018.01.16 Bywgma
    Read More
  10.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 3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   예수님의 족보 .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
    Date2018.01.05 Bywgma
    Read More
  11.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1- 하나님의 구원계획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1   내 양을 먹이라 - 요한복음 21장(2)   요한복음이 제자들에게 준 사명 복음전도는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으로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양자로서의 사명을 말하고 있다. 이는 10장에서 “나는 ...
    Date2017.12.19 Bywgma
    Read More
  12. [권혁승 목사] 말씀으로 양육하는 자녀(6)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

    [권혁승 목사] 말씀으로 양육하는 자녀(6)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하나님 사랑의 우선적인 실천 강령은, 하...
    Date2017.12.18 Bykim
    Read More
  13.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3-40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3 지켜줌을 위한 기도 : 17장 (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기도이다. 이 기도는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1)자신을 위한 기도(1-5) -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기도 ...
    Date2017.12.07 Bywgma
    Read More
  14. [권혁승 목사] 여호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5)

    [권혁승 목사] 여호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5)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 ‘쉐마’의 핵심은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여호와께서는 오직 유일하신 한 분이시기 때...
    Date2017.11.14 Bykim
    Read More
  15.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0-32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0 예수나무에 붙어 있으라 : 15장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핵심은 성령님이시다. 3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여전히 그들...
    Date2017.11.13 Bywgma
    Read More
  16. [권혁승 목사]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4)

    [권혁승 목사]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4)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한 분이신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자연스럽게 한 곳으로 모이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한다. ...
    Date2017.10.28 Bykim
    Read More
  17. [세르게이 선교칼럼] 생각의 폭을 확장하라

    [세르게이 선교칼럼] 생각의 폭을 확장하라 너무나 한국적이고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실! 러시아 교회 나는 요즘 카카오톡 기도방 모임을 통해 소식을 나누며 기도하는 선교사 단체들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참으로 귀한 모임이라는 생각을 한다. ...
    Date2017.10.10 Bykim
    Read More
  18. 이응주목사칼럼- 귀 눈 마음에 대한 교훈

    이응주목사칼럼      귀 눈 마음에 대한 교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
    Date2017.09.27 Bywgma
    Read More
  19.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8-29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8   아버지께로 가는 길 8이란 숫자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8번째 표적인 십자가로의 길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
    Date2017.09.23 Bywgma
    Read More
  20. [권혁승 목사] 아버지의 집(베이트 아브)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구약시대의 가정, 아버지의 집 이해(3)

    [권혁승 목사] 아버지의 집(베이트 아브)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구약시대의 가정 ‘아버지의 집’ 이해(3)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
    Date2017.09.07 Bykim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 46 Next
/ 46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