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교훈을 받아라! 잠언 6장 6-11절
세상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사람이다.
히브리어로 앗슬라, 앗셀, 레미야란 말로 기록된 게으른 자는 “게으름뱅이”, “빈둥거리는 자”, “농땡이 부리는 자”란 뜻의 Sluggard로 6번, “게으른 자”, “나태한 자”, 태만한 자“란 의미의 Slothful로 17번 등 성경에 ”게으른 사람“이란 단어는 23번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게으른 사람, 농땡이 부리는 사람, 나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예수님의 저주는 소름이 끼치고 무서울 정도이다.
마 25: 14-30의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맡은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올 때 숨겨뒀던 한 달란트를 내놓는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다. 이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 진리를 설명해준다.
성경이 말하는 게으른 자는 어떤 사람인가?
1.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고맙게 생각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자였다(마25:18절)
2. 하나님께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잘못된 추리의 사람이었다.
3. (최선을 다하라는)주인의 뜻을 왜곡하는 부당하고 부정한 사람이었다.
4. 자기 주인을 비난하기 위해 주인의 결점을 찾고 트집거리를 찾는 자였다.
5.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기변명의 사람이다. 6. 일하기를 두려워했던 자였다.
하나님은 실패가 무서워 일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보다는 차라리 일하다가 실패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7. 말 그대로 악한 자였다.
게으른 자의 처벌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은 게으른 사람에게
1.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무섭게 책망하시고 꾸중하셨다. 장차 심판의 날에 게으른 사람에게 내려질 형벌은 무서운 책망뿐이다
2. 게으른 사람 자신이 입으로 말 한대로 판결을 내리셨다.
3. 게으른 자가 주인과의 신용거래를 실패한대로 판결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믿고 여러 가지 재능을 주셨는데 그분의 믿음을 저버리고 신용거래를 실패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4. 게으른 자의 모든 달란트재능을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드셨다.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에게서 잘려 추방당했다. 그래서 게으른 자의 마지막 운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 재능을 게으르게 사용하는 자를 싫어하시고, 자기가 맡은 사명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렇지만 자기사명을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성도는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칭찬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게으른 사람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가르치기가 어렵고, 무사태평하여 경솔하고 경망스러우며, 아무래도 좋고,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냉담하고 무감각 무관심한 자들이다(잠6:6-9절)
잠 10: 26에선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Vinegar)같고 눈에 연기 같다”고 했다. 게으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며 윗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이란 말이다.
중요한 약속시간에 게으름 피우다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초조하며, 게으른 사람을 일군으로 쓰는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고 천불이 나며 염증이 나겠는가? 당신은 예수님이 보실 때, 답답한 사람인가, 반가운 사람인가?
게으른 사람은 자기마음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일이 실현된 것같이 생각만하는 원망적 사고자일 뿐 꿈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다.
미련한 가축처럼 게으른 사람은 아주 사소한 장애나 어려움도 극복하기를 싫어하여 모험이나 도전을 두려워 해 그 모든 일을 회피하고 변명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 9) 게으른 자들은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곶감 빼먹듯 모두 탕진하고 낭비하므로 사회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해로운 존재, 백수다.
종말시대에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는 영적으로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열심을 내서 회개하는 성도들이다(계 3: 17-21) 그런 성도들만이 주의 날에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축복을 받는다.
게으른 자는 자신의 영적 물질적 육체적 소유물이 마귀에게 겁탈당하고 파멸당하도록 쉽게 허용하는 자들이며, 자기착각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바른 판단에 근거해 의견을 제시하는 선한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 완벽하고 지혜로운 여러 사람(다수)의 의견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게으름과 부지런함, 나태함과 근면함은 당신의 삶의 환경마다 그 상황과 색깔이 다르다. 학생의 부지런함과 가정주부의 게으름이 다르고, 직장인의 근면함과 사장의 나태함이 다르며, 집사 장로 권사의 부지런함과 목사의 게으름이 다르다. 당신은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집사 권사 장로로, 목사로 부지런한 사람인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인가? 가까운 장래와 먼 훗날에 ‘그때 하루 한 시간만 더 기도했다면, 하루 30분만 성경을 더 읽었더라면, 그때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면...,비참한 오늘의 나는 아닐 것이고, 지금의 아픔과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 후회하는 날이 없게 되길 축원한다.
개미에게 교훈을 받아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6:6-8, 30:25)
지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근면한 곤충이다. 최상으로 산업(공업)화된 곤충. 적당한 시기에 양식을 준비한다. 새끼들에게 상냥하고 다정스럽게 애착을 가지게 한다.
동료들을 위한 강렬하고 날카로운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다. 드러내 보이거나 나타내려고 일하지 않는다. 일을 마칠 때까지 지루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일한다.
(개미왕국)군집(群集)공동체의 최선의 유익을 위해서 놀랄 정도의 조직계통으로 함께 일한다. 지하터널을 뚫고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독창력이 있고 손재주가 뛰어난 목수들(목공들)과 석수(벽돌공-석공들)들이다
주도면밀하고 꼼꼼하며 정성들여 자기들 집을 청결케 한다. 공동체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서로 돕는 일에는 누구도 일정한 직업이 있지 않다-공동체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적과 원수들로부터 자기 집과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싸운다.
개미들의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삶은 여러 면에서 인간의 삶과 비교가 된다. 개미들은 고도로 총명하고 지혜롭다. 개미들은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주권통치자의 강요가 없이도 필생의 사업(일)을 자발적으로 잘 수행한다.
이것이 성경이 그것들의 지혜를 칭찬하고, 곤충학에서 그것들의 지혜를 밝혀낸 미물의 곤충 개미들이다. 솔로몬은 만물의 영장 인간들에게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로 설파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이 질문은 삶이 질척거리다 못해 나태의 나락에 빠져버린 사람을 죽비처럼 내리칠 물음이다. 그리고 삶이 방향을 잃은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표류하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나아가 비계처럼 쌓인 자만과 오만을 사정없이 찌르는 삶의 송곳 같은 물음이다.
‘기억’이란 단어 때문에 과거지향적인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너무나 현재진행형적인 물음이고 곧바로 다가올 미래와 결부된 질문이기에 두렵기까지 한 물음이다. “당신은 죽은 후 무엇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겠는가?” “당신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사람으로 심판을 받겠는가?” 게으른 사람인가, 부지런한 사람인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름의 삶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불을 걷어차라!
그것만이 당신이 살 길이다. 역사는 부지런한 사람을 위해 빈자리를 내놓고 있다. 당신의 하루의 역사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새벽을 깨우라! 새벽을 정복하는 사람은 역사를 정복한다. 이제 이후의 삶이 날마다의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자의 역사로 새롭게 쓰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기도문교회 김엘리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