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과 포기 (막14:32-42)
시간의 농도 이야기, 모든 시간이 다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의 10배, 100 배의 농도를 가진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은 바로 이농도 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달려 있다.
모든 시간을 어떻게 사는가보다, 이 농도가 짙은 시간에 사람들은 결국 그의 됨됨이 살아가는 방식, 가지고 있는 그것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지, 잘한다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농도가 짙은 그 시간에 바로 그 사람의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 됨됨이가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그의 삶의 이야기는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의 삶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이라면 그분이 이 땅에 33년이나 사실 필요가 없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일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자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그 삶의 길, 삶의 방식을 모범으로 보이신 분이시다. 이 점을 주님께서도 분명히 하셨는데(요 13:15)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이 무엇인가? 바로 거룩의 삶! 그분은 우리에게 돈 버는 법, 건강하게 사는 법, 성공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본으로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 삶을 통해서 배우고 닮아가야 할 것은 바로 ‘거룩’이다.
33년 중에서 30년은 사생애 였는데, 그 중에 아주 특히 농도가 짙은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 주님은 바로 거룩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겟세마네에서의 시간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농도 짙은 시간이 겟세마네에서의 시간이었다. 주님의 생애 가운데 그때만큼 절박하고 중요하고 집중되었던 적은 없었다. 오죽하면 누가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표현을 했겠는가?
그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 시간으로 역사의 축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역사 상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의 시간은 온 역사를 위해 드러난 중요한 순간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농도가 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결정이 난 그런 상태에서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겟세마네에서의 한, 두 시간은 주님의 삶에 있어서도, 온 역사에 있어서도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그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보여준 것은 바로 ‘거룩의 삶’ ‘거룩한 삶의 길’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거룩하시니까! 그의 중심이 거룩하니까! 그것이 겟세마네에서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보여주신 거룩의 길, 거룩의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포기’였다. ‘내려 놓음’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바로 그것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붙들고 싸우고 몸부림치면서 이루어낸 것은 바로 ‘포기’‘내려놓음’이었다. (막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서 주님은 보여 주십니다. ‘거룩은 포기라는 것을,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거룩을 보아왔지만, 거룩의 가장 실제적이고, 중요한, 긴급한 주제는 바로 이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거룩의 실제는 포기하는것
(1) 거룩은 구별됨이기 때문에 거룩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카도쉬나 헬라어 하기오스나 그 뜻이 구별됨인데, 그 어원은 ‘잘라냄’이라는 것. 즉 세상과 구별되려면 세상의 것을 잘라내야 하며 포기해야 한다.
(2) 거룩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 먼저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자기 포기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는가? 자기 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포기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포기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필수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거룩의 가장 실제적이고 긴급한 주제는 내려놓음’, ‘자기 포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바로 이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내려놓는다고, 무조건 포기한다고 다 거룩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내려놓는데, 포기하는데, 그것이 거룩이 아니라 세속일수 있습니다. 상처일 수 있습니다. 죄일 수 있습니다. 죄에게 당하고 씹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포기하되, 생명 에너지를 올리라
어떤 경우에 포기한다고 하면서, 그 마음에 꿈도, 기쁨도, 기대도, 희망도 다 내려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그래서 삶의 에너지가 떨어지고 열정이 사라진 삶을 산다면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거룩을 위한 포기이다. (42절)“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포기 했지만, 그 삶의 에너지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삶의 느낌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신앙을 위해 세상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는 못내 재미없어 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포기가 제대로 안된 것입니다.
부부간에 갈등이나 혹은 자녀에 대한 어떤 부분에 힘들어하다가 포기했는데, 그것 때문에 꿈이 없어졌다면, 그것은 거룩을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여전히 기대와 꿈이 있어야합니다. 여전히 그 관계가 아름답고 좋아야 합니다.
포기하되 그것으로 끝내지 말라
포기하는 것이 만일 그것으로 끝이라면, 그것은 도망가는 것입니다. 도망가는 것은 거룩을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포기한다고, 가정의 문제로부터, 혹은 교회의 문제로부터 도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을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회피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위한 포기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내 뜻, 내 원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내려놓음입니다
포기하되 뒤를 돌아보지 말라
포기 했다고 하는데, 내려 놨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끈이 연결되어 있거나. 미련이 남아 있거나, 혹은 다시 불붙을 여지가 있는 것은 거룩을 위한 진정한 포기가 아니다.
포기는 묻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세속도시의 대표로 소동과 고모라를 말하면서, 그 스토리 가운데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이야기를 결연히 보여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포기 했다고. 떠났다고 하지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완전히 버리지 않은 그 삶의 결론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결론
거룩은 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우리 속에 갖가지 욕심과 욕망, 상함이 많은 상태에서 거룩을 위해 가장 중요한 Key Word는 바로 ‘포기’ ‘내려 놓음’ 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 하시겠습니까?
박정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