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3:16-18의 66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오마바 의료보험이 등장하면서 교계에서 가장 큰 핫 뉴스가 베리칩이다. 베리칩은 짐승의 표인 666이므로 받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오바마케어가 시작되면 베리칩을 누구나 이식해야 한다고 하며, 미국에 있으면 베리칩을 받게 되므로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자들도 있다. 베리칩 이전에는 바코드가 666이라고 하기도 하고 컴퓨터가 666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는 로마시대의 네로 황제라느니 로마 가톡릭의 교황이라느니 미국은 대통령이라고도 한다. 언제가는 공산주의가 666이라고 한 때도 있었다. 왜 이렇게 666가 무엇인가의 주장이 각각 다른가? 이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666을 보자.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인간의 나라
성경의 구도를 보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의 권리(주권)은 “하나님의 보시기에”라는 문장에서 요약된다. 한편 사단은 뱀을 통해 인간을 유혹한다. 그 유혹의 내용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다. 인간 보기에 좋도록 행하는 인간의 나라를 만들라고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간다. 이러한 구도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4-5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지가 소개된다. 거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한다.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 4:3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로, 성령 하나님의 모습이 4:5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 곧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성자 하나님의 모습은 5장에서 사자의 모습이면서 어린 양의 모습이 겹치면서 등장한다. 여기에 요한계시록 12-13에 보면 사단의 진지가 소개된다. 그런데 사단의 진리란 인간 나라의 진지이다. 12장에 용이 등장하고 13장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나오는 이들이 거짓 삼위일체를 이루어 인간 나라를 이룬다. 하나님 나라의 삼위 하나님의 수자는 777이라면 인간 나라의 거짓 삼위는 666이다. 결국 신권(신본주의)와 인권(인본주의)의 싸움이다. 요한계시록 7:14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666은 인간의 수다
요한계시록 13:18을 보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여기에는 짐승의 수가 곧 사람의 수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짐승과 같아질 때이다. 사람이 어떻게 짐승과 같아지는가? 이는 창세기 2에서 밝혀준다. 짐승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니 생물이 되었다(19절)고 했고, 사람은 흙으로 빚고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7절)고 기록하고 있다. 생물이나 생령은 영어로는 living soul로 같은 의미다. 원어로는‘네페쉬 하야’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불어넣은 생기다. 이는 피조물 중에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교제가 없는 자는 짐승과 같다. 짐승의 특징은 본능에 충실하다. 인간의 역사가 흘러 포스트 모던니즘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삶은 감성대로 살아간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점차 본능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짐승의 삶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인간은 개개인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집단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인권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주인됨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라는 덩어리는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인간의 권리(인권)에 초점을 맞추는 인간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인간이 세운 제도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제일 큰 제도는 국가 자체이며, 그 어떤 제도적 장치라도 상관없다)는 인간의 권리보다 하나님의 권리를 내세우는 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동성결혼의 합법화가 최근의 예이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교회마저도 하나님이 죄로 규정한 동성결혼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이다. 동성애가 포함된 차별법은 점차 그 힘의 범위를 넓혀 갈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인간의 권리가 손상을 입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마저 거기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 인간이 만든 제도에 하나님의 권리보다는 인간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는 이론들이 등장한다. 세상은 그렇다고 하자.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이론이 먹히기 시작한다. 성경조차도 인간의 권리를 추구한다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인간 자체적으로도 인간이 만든 제도가 이를 선도하고 인간의 이론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게 인간은 종합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움직이는 세계, 666은 인간들의 머리와 오른 손에 새겨지기 시작한다. 신명기 6:8은 “너는 또 그것(하나님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로 삼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른 손과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마는 눈에 뜨이는 장소이다. 오른 손은 강함을 의미한다. 인권과 인간주의는 최고의 미덕으로 눈에 드러나게 보여져야 하고 그것이 세상을 강하게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666이 되기를 거절한 자는 경제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요한계시록 6:17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우울한 말씀이다. 교회 내에서도 돈이 우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돈으로 행복조차도 살려는 오늘의 시대, 앞으로는 더 심각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를 디모데후서 3:1-2에서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 이어서 6-7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돈 자체는 문제는 없으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다.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그 강도가 더 심각해진다.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럼 오늘날 경건하게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에게 다가오는 압박은 무엇일까? 돈이다. 돈 앞에 믿노라 하는 자들도 넘어진다. 세 번째 인사건(요한계시록 6:5-6)은 세상의 끝 날이 다가올수록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을 내다 보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주의자 되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살아라. 좋은 말로 휴먼니시트(Humanist)되라. 인간의 자유와 박애와 평등 얼마나 좋은 단어들인가? 그러나 사단은 그 인간적인 삶에 열광하는 자들의 뒤에 숨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66은 인간 자체를 가르치는 숫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