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8

by kim posted Mar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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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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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을 어겼다.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의미를 상기 시킨다. 율법은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을 가지고 지켜져야 한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여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 곧 교회의 성도는 사랑함이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삶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신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가?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복 있는 자란 행복한 자이다. 행복이란 얼마를 가졌고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그래서 시편 1편은 복 있는 자는 의의 길을 걷는 자라고 말씀한다. 의의 길을 걷는 자란 특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자란 의미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는 하나님이 알아주는 자란 이야기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했다면 그 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특별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그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너희와는 다른 사람이야를 내세우고 싶어 했다. 실제로 바리새인리라는 말은 거룩한 자란 의미로 구별된 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이 한 일이 사람 앞에 무한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한 삶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들의 마음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어떠하나 하면서 마음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이러한 자들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에 대하여 이 땅에서 다 보상받으려고 한다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시작은 분명히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본질이 바뀐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0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마태복음 6:2-4]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상화된 일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남을 돕는 일이 삶의 모습이 되도록 하였다. 신명기 10장에 보면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하신다(10:13). 우리의 행복을 위하시는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고 하신다(10:18).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들을 돕는 것은 율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었다고 믿었다


구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구제하는 일은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다. 이는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입으로 떠들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요 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로 인하여 자신이 돋보이고자 하는 것은 위선이다. 떠들지 않아도 조그마한 손길의 도움이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기뻐하시는데, 왜 그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까 싶어 안달하며 자신의 구제하는 손길이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인정받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하시는 질문이다.


구제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조차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해들을 하시는 것 같다. 겸손한 척 하는 것도 교만이라는 말이 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구제할 일이 있으면 하면 되었다. 억지로 숨어가면서 할 필요는 없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강도만난 자가 자신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자이다. 그런데도 이유는 단 한가지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어서 살려야겠기에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줄 바에는 그가 완쾌되도록 끝까지 도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일을 했다. 거기까지다. 이것을 억지로 숨겨가면서 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떠들면서 내가 원수조차도 이렇게 도왔다고 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그 일을 해야겠기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것도 아니다. 억지로 숨기고자 한 것도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주었다. 단지 그것이다. 이민 온 가정이 차편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움을 주었다. 단지 그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준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았다. 숨어가면서 도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알아주라고 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선한 일을 기억하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6:5-7]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큰 소리로 하든지 소리 없이 하든지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알아달라고 하는가?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다고 떠들고 다니는가? 기도의 본질은 사라지고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만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는 것은 위선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해하지 말자. 반드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광장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기도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기도하는 모습이 진정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단지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하는 것이라면?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큰 소리로 외쳐야만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물론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이 너무 간절하다보면 크게 외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골방에서 소리 없이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이다. 기도는 사람들이 보든지 안 보든지 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지는 큰 소리로 하든지 골방에서 문을 닫고 기도하든지 하나님은 들으신다는 것이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기도하기 전에 구제하기 전에 이미 나의 마음을 먼저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나의 가슴의 아픔도, 어찌할 줄 모르는 나의 기쁨에 찬 환호도 하나님은 먼저 아신다. 나의 어눌한 말에도 하나님은 나의 구할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신다.


예수님이 묻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왜 사는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함이냐 아니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함이냐? 잠언서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다.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김성철 목사(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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