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읽기 9- 10

by wgma posted Apr 19,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읽기 9

 

3(1) :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1


 0db6ca85b158c0ed6ea3f15a29d68da1.png


요한복음 3장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거듭남, 믿음 그리고 영생. 이러한 주제는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정치적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주어진다. 3장의 구도는 이렇다.

1-13: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14-15: 연결고리 (놋뱀사건)

16-21: 복음의 선포

 

하나님의 나라

 

(1)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에 왔든지, 아니면 바쁜 낮이 아닌 충분히 대화를 나누기 위하여 밤에 왔든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요한복음은 변화의 중요한 시작으로 다루고 있다. 니고데모는 왜 예수님을 찾아 왔는가? 영생을 묻기 위하여? 아니다. 영생의 문제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연관된 것이지 니고데모가 영생의 문제를 묻고자 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왜 니고데모가 찾아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끄집어내어 말씀하신다. 그렇다. 니고데모는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묻고자 했다. 유대가 바벨론에게 망한 후 계속 그 지역의 패권 국가의 속국으로 있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다. 4백년을 나라를 빼앗긴 채로 살고 있었다. 당연히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대의 정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가장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한 소문은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면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다고 니고데모는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은 언제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2)니고데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니고데모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지고 올 다윗과 같은 메시아(히브리어) 또는 그리스도(헬라어)라고 믿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왕이 된다면 제자들은 어떤 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게 되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마침내 예수님에게 묻는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

(3)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인 이스라엘 국가가 아니었다.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개인들이 모인 모임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나라의 회복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창조주되시며 구원주와 심판주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장소가 성전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전의 회복은 곧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같은 의미로 설명되고 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1)예수님과 니고데모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니고데모는 영적인 하나님나라를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제 아무리 학식이 풍부한 니고데모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에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고 말씀하신다.

(2)‘본다라는 용어를 주목해 보자. 이 단어는 니고데모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한복음 3:2)에 등장하는 안다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눈에 보여졌기 때문에 그렇게 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눈에 보여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다고 요한복음 2:23에서 밝혔듯이, 니고데모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임을 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안다라는 단어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곧 알 수 없다고 말씀한다. 거듭나기만 하면 하나님나라를 눈에 보듯이 보고 믿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거듭나다라는 말은 문자대로 다시태어나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이 육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놀라서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한복음 3:4) 예수님은 영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니고데모는 육적인 것으로 이야기하니 서로의 대화가 순탄할 리가 없다. 그런데 거듭나다라는 말 속에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새롭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4)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더듬어 보자.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달랐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말씀하면 니고데모는 이스라엘국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리되면 예수님의 영적 의미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니고데모의 생각을 완전히 철저하게 버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도 알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듭나라라는 의미는 생각 곧 믿음을 철저하게 새롭게 바꾸라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한다며 이 말의 일차적 의미는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사고방식 곧 생각과 믿음을 바꾸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가기로 했다면서 생각(믿음)은 전과 다를 바 없다면 그 사람은 결코 새로 태어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 어디에서부터? 생각이 달라진다. 고린도후서 5;17을 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은 지금 당장 바꾸어진다. 생각은 행동하게 하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어지면 인격이 된다. 거듭난 삶의 일차적 변화는 당신의 생각이 철저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5)거듭난다라는 말은 단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철저하게 바꾸어지는 것이다. 에베소서 4:22-24을 보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의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이 구절은 거듭남에 대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성경의 생각을 더하여 나의 지식이 더 많아졌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나의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생각 곧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하나님나라가 보이고 성경이 분명하게 내 눈앞에 다가온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거듭나다라는 말속에는 이미 말한대로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철저하게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위로부터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야기하고 계심을 기억하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는 말을 하고 있다. 철저하게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데 무엇을 따라 바꿀 것인가가 분명해야 한다. 바로 위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3:5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다음 호에 할 이야기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읽기 10

 

3(2) :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2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용어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의인이란 말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의라는 용어를 붙여서 말하고자 한다면 신의 또는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배운 학문의 지식과 경험에서 축적된 지식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의 개념을 이해하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니고데모가 그랬다. 오히려 학식이 많았기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디모데후서 3:15을 보자.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어떠한 믿음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곧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믿음 곧 생각이다. 세상의 논리와 지식 그리고 경험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씀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생각하고 믿어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거듭남 곧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가진 생각을 철저하게 버리고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대로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생각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철저하게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가지되 위로부터 곧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눈에 보듯이 알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위로부터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는 어떻게 우리는 영적으로 태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다.

 

물과 성령으로

 

(1)요한복음 3:5은 바로 번역되어야 한다. 한글성경은 바로 번역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런데 킹제임스영어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잘못되게 번역한 것도 있다.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흠정역) 헬라어 원문을 보면 ‘--으로부터라는 전치사는 한번 나오고 그 뒤로 물과 성령이 뒤 따른다. 3절에 다시 태어나다라는 말을 사용했기에 5절에서는 단지 다시라는 말은 없고 그냥 태어나지 아니하면이라고 기록되어있다.

 

(2)‘물과 성령에 대하여 성령에 대하여는 거의 같은 견해를 가지지만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물을 육적 탄생으로 보는 견해와 침례(세례)로 보는 견해 그리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3)바른 이해를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구절들이 있다. 고린도후서 5:17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하나님나라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신분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삶을 보자. 철저하게 변화되었는가? 그러나 무엇인가는 확실히 바뀌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생각 곧 믿음이 달라졌다. 내가 보기에 좋도록 살아왔던 삶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으로 철저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생각하는 바는 옛날 그대로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다. 왜냐면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나의 삶의 모습은 옛 생활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따라 우리의 생각(믿음)을 바꿀 것인가? 에베소서 4:23,24이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롭게 되라고 한다. 더 구체적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한다. 22절에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한다. 완전히 철저하게 새롭게 다시 태어나라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 갈라디아서 5:16에서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한다. 에베소서 4:24을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이다. 살짝 의역하면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 안에서이다. 의와 거룩이 진리에서 나온다. 그럼 진리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4:6에 의하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곧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진리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새롭게 되라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이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철저하게 걸러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배운다.

 

(4)성경은 막연히 이야기 하지 않는다. 언제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나의 거듭남을 어떻게 알고 확신하는가? 감정적으로? 아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되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의 문장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4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그렇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다. 말씀 앞에 굴복 당했다. 말씀이 주어지면 자신의 생각은 철저하게 버렸다. 말씀을 따라 당신의 생각은 바뀌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당신의 생각이 바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위로부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태어나라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5)이제 다시 요한복음 3:5로 돌아가자. 물의 기능은 씻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철저하게 씻어버려야 한다. 무엇으로? 말씀이다. 에베소서 5:26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무엇으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과 구별되는가? 말씀으로 씻어 깨끗하게 됨으로 구별된 자가 된다. 야고보서 1;18에서는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1:23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우리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진다고 밝힌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6)물이 말씀을 의미한다면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어떠한가? 말씀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논리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바로 말씀을 알 수가 없다. 성령의 가장 근본적인 역할에 대해 요한복음 16:13에서 우리를 말씀(진리)으로 인도하는 일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주장하면 어떻게 성경을 바로 이해하도록 하는가? 고린도전서 2:10을 보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가슴)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한다. 나의 슬픔이 아닌 하나님의 슬픔으로, 나의 열망이 아닌 하나님의 열망으로,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진노를 가지고 성경을 대하게 된다.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된다.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2:13-14을 보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렇다. 영적인 것은 영으로 안다. 이를 예수님은 요한복음 3:6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말씀과 성령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7)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어찌 아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어찌 아는가? 알아야 믿을 것 아닌가? 어떻게 전혀 문자도 모르는 자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믿어지는가? 세상 지식을 따라 말씀을 내가 믿어보고자 하니 안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씀을 보니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삶이 시작된다.

64134609b9913a96b896424f52f72a23.jpg





Articles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