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13
3장(4) : 비교될 수 없는 예수
요한복음 2장에서 보여준 가나 혼인잔치에서 보여준 표적의 의미는 변화다. 그 변화는 생각(믿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나라로 여겨졌던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화두를 가지고 왔던 니고데모에 대하여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철저하게 처음부터 새롭게 바꾸라고 곧 거듭나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영생의 문제와 직결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의 길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메시아이시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 곧 받아들이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요한복음 3장은 복음으로 선포한다.
세례 요한의 선언
세례 요한은 당시에 그리스도로 오해되기도 할 만큼 소문이 자자한 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야 할 자였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소개했다(1장). 세례 요한을 따르던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이를 걱정하며 이야기 하자 세례 요한은 다시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야기 한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3:28-30) 예수님 곧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자신은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세례 요한이 이야기한 것이다. 1:26-27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자신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그렇다.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것은 도저히 견줄 수 없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 예수님은 어떤 인간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다. 요한복음 3장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비교될 수 없는 예수님.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31절)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차이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와 땅에서 난 이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에 대해서는 니고데모가 이미 2절에서 밝혔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다. 니고데모와 31절은 차이가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이 땅에 오신 자라고 말한 반면, 31절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계속해서 오시고 있는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땅에 계시지만 또한 하늘에도 계신 분이다. 이는 이미 13절에서 밝힌 바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킹제임스성경)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참 사람이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존재이다. 어떻게 땅에서 난 이 곧 사람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세례 요한과 견주어 비교될 존재가 아니다. 이미 창세기 1:1이 이를 선언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과 비교될 수 있는가? 그래서 31절은 계속 이야기 한다.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니 어찌 피조물인 그 어떤 만물과 비교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32절)
(1)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이 들려주신 것을 기록한 책이다. 세례 요한 역시 하나님이 들려주신 것을 세상에 선포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예수님은 친히 보고 들은 것은 세상에 선포하신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보다’는 것은 현재 완료형이라면 ‘듣다’는 부정 과거형이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이 의논된 것이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이미 하나님은 정해 놓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인가를 지켜보시고 계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하셨다(갈라디아서 4:4).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식을 세상에 선포할 따름이지만, 예수님은 친히 인간 구원에의 뜻과 계획 그리고 방식에 직접 참여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어찌 인간에게 비교될 수 있는가? 요한복음은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고자 기록하고 있다.
(2) 단지 이스라엘의 회복(독립)을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 곧 영생의 길을 주고자 오신 예수님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의 증언을 받을 자가 없도다.”(3:32)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증언 곧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생의 길이 주어진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는가?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3:34) ‘인쳤다’는 의미는 ‘비밀이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은 선포된 비밀이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구주를 보내주실 것이며 그 구주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구원 곧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를 선지자들에게 알려주어서 선포하게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참된 것 곧 신실한 것이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 구원의 약속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렇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친히 보고 들은 생명의 말씀 곧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서는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한 분 곧 그의 약속하심을 지켰다고 증언할 것이다.
(3) 3:34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일임을 밝힌다. 예수님은 친히 관여하신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되다 하는 것과 같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생이 예수님의 손에 주어졌다(35-36절)
만물이 다 예수님의 것이다고 선언한다(3:35). 그리고 이 말씀은 36절의 영생과 연결된다. 곧 영생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하나님이 정하셨을 때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주를 세상에 보내주실 것이 약속되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영생은 에수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졌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이스라엘의 회복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의 관심을 영생의 문제로 돌리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생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요한복음 3장은 다룬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졌다. 인간의 살고 죽는 문제가 예수님에게 달렸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자이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