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1-20- 8장 자유함.7장 정리하기

by wgma posted Jul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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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1

 

8: 자유함

 

요한복음 8장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 죄 가운데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을 듣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요한복음 8장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놀라운 복음을 듣게 된다.

 

죄로부터의 자유 선언(1-11)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끌려와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간음한 여인은 좋은 미끼였다. 모세의 율법을 내세워 여인을 돌로 칠 것인가를 물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는 세리와 창기들과도 식사를 같이 하곤 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흥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몸을 굽혀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군중은 간음한 여인에게서 예수님의 행동에 눈길을 돌렸다. 군중들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싶었을 때 예수님이 일어나서 한 말씀은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여인만이 남았다. 그리고 묻는다.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인이 말한다. “없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이 이어진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다시는 이 죄를 범치 말라.”

우리는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여인은 분명히 죄를 지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이 죄로부터 해방 곧 자유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거기에 있었던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다. 이미 7:19에서도 밝힌 바 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로마서 3:23은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그런데 여인은 예수님 앞에 서있다. 그 여인은 스스로도 자신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은 죄없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죄에 대한 어떤 형벌도 받지 않고도 죄를 면한다? 요한복음 8장은 이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12-30)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두 번째 자기 선언과 연관이 되어 기록되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빛이 있으면 확실하게 보인다. 길이 보이고 물건이 보이고 모든 것이 분명해 진다. 그런데 그 빛이 생명의 빛이다. 생명을 얻게 되는 길이 보인다. 생명으로의 길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예수님 안에서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어둠의 세상을 밝혀 하나님께 인도하는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하나님에게 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어떻게?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가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증언은 스스로를 위한 증언이니 참되지 않다고 예수님이 7장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공격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안다 곧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이니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아버지 곧 하나님도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이 묻는다.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의 답변은 분명하다.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다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왔던 곳으로 다시 갈 것이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 곧 하나님나라에 결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진리가 자유롭게 하리라(31-50)

 

죄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치루지 않고 죄의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답하신다. 그러면서 먼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여기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배워서 아는 것’ ‘관계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냥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워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움은 단지 글자를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배워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국가적으로는 남의 나라의 속국으로 있을지언정 자신들은 영원히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죄의 문제로서 그들의 생각을 바꾼다. 진정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은 마귀를 아비로 두었다고 말한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 하는 자이니 거기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진리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14:6에서 생명 곧 하나님께 인도하는 길이 진리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진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관계없는 자는 진리 자체를 알 수 없다. 8:36에서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선언하신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보고 즐거워하였다 (51-59)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지키면 영원히 산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영원히 산다니 무슨 말인가 도대체 너는 누군가 하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때 곧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어린 양으로서의 예수님을 보기를 즐거워 하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8:56)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창세기 22). 이때 하나님은 수풀에 이미 준비해 놓은 숫양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바치게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이 이를 여호와 이레라고 하였다. 한글 성경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번역했는데,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이를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로 번역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앞으로 구주되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다. 이를 믿을 때 영생을 얻게 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0

 

7: 정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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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의 열정에 찬 설교다. 예수님의 표적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의 설교는 이어진다. 이미 1-5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열정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기 전에 이제까지의 설교를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보고서냐 아니면 말씀으로냐

 

요한복음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결과만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었다. 특히 오병이어의 표적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피하셨다. 예수님의 오심은 사람들에게 썩어질 양식이 아닌 영생을 주고자 하심이었다. 요한복음에 등장한 표적에는 각기 그러한 표적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여지는 것만을 보았다. 그 표적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제 7장을 보자. 이스라엘의 최대 절기인 초막절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요구했다. 당시 예수님의 형제들조차도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이신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들은 눈에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보여주기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표적등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성전에 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믿으라고 하신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8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문제는 믿음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는데 있다. 곧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병이 낫고 방언을 하고 그래야 믿음이 있는 자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만일 여전히 가난한 상태로 있다면? 여전히 병중에 있다면? 여전히 아무런 은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감옥에 갇혔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베드로의 이야기는 자주 들으면서 또 한 사람의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 야고보가 그냥 칼날에 죽음을 당한 사건은 듣지 못하는가? 야고보는 믿음이 없어서 그냥 목베어 죽음을 당했고 베드로는 믿음이 좋아서 살아났는가? 우리는 6장을 마무리 지으면서 베드로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리이까?”(6:68)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 믿음의 판단은 눈에 보여지는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니다. 구원을 위한 믿음이다. 요한복음은 그 목적을 밝혔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영생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7장에서는 예수님의 어떤 기적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해서 8장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함 받지 않는 기록이 나온다.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죄인의 모습이었으나 예수님으로부터는 죄인으로 정죄받는 것에서 해방된다. 요한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7:40-42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두 종류로 나누인 것을 본다.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자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여전히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로 나뉜다. 오직 말씀이 믿음과 불신의 기준이 된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우리는 오직 말씀을 듣고 믿어 알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첫 장면인 창세기 12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창세기 12:4)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말씀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긴장이 맴돌고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이라하여 하나님과 동등시함으로 유대인들로부터 특히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왔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예수님은 이제까지의 말씀을 요약해서 말씀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말씀이라고 한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가지로 말씀하신다.

 

(1)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7:18) 자기를 나타내 보이는 자는 스스로 말하는 자 곧 자기 말을 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의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하는 자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인가?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자기는 이런 자다라고 자랑하는 자이다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곧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고 자신의 말씀은 영생에 관한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이다. 19-24절을 들어보자. 모세의 율법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켰음으로 자신을 드러내자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됨의 표식이 아닌가? 할례는 안식일에도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할례를 안식일에도 행함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고 유대인들은 주장하고 있었다.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이렇다. 하나님은 살리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 남을 비판하고 남을 죽이고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남을 칼로 찔러 죽이지 않았다고 율법을 지켰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말로도 사람을 상처를 주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인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로 모세의 율법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모세의 율법을 누가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면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다니? 율법을 지킨다고 할례도 안식일에 행하였다면 병든 자를 안식일에 살렸다는 것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7:24)고 말씀하신다.

 

성령이 주어질 것이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든지 잡아 죽이고자 하여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기가 사람들 사이에 높았음으로 함부로 예수님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예수님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아직은 아니었다. 7:33-34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사람들 중에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유대 땅을 떠나 헬라인들을 가르칠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 자도 있었다. 실제로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자가 메시야(그리스도)로 믿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은 아예 그들의 생각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7:37-39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미 4장에서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기 7장에서 생수의 강에 대하여 언급한다. 누구에게 생수가 넘쳐 흐르게 되는가? 목마른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믿는 자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이 주는 영생을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과 논리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제자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요한복음 7장과 8장을 지나 소경된 자를 고쳐주는 또 하나의 표적을 통하여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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