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8-29

by wgma posted Sep 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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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28

 

아버지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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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란 숫자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8번째 표적인 십자가로의 길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실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주어진다.

 

13: 이후에는 알리라

 

그 가르침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났다.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다. 식사 도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가룟 유다가 나간다. 이제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되었다. 제자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오직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길이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따라 나섰나?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제자들은 머지않아 예수님이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꿈을 꾸어왔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며 그러나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자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이해했다. 예수님이 자기가 가는 길을 제자들이 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가 나선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노라고.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라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조차도 내놓고 로마와 헤롯과 싸울 수 있노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 중에서 그나마 머리 회전이 잘 돌아가는 자가 가룟 유다였다.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이 보였다. 무엇인가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계기가 필요했다. 가룟 유다는 그 일을 이제는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떠난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를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계속 남아 있었다. 이것이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차이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행동한다. 다른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것을 지켜 볼 뿐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하신 말씀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이다.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상에 남아 예수님이 왜 죽으시고 부활했는지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이 일은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요한복음 3:16에 기록된대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이다. 여기에서 이처럼이와 같은 방식으로이다. 어떤 방식? 생명을 주기까지 한 사랑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사랑함이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당시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 아버지께 가는 길

 

요한복음 14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 말씀을 하신다. (1)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 (2)성령님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말씀을 하나로 이어주는 말이 아버지 곧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하나님께 가는 길, 이것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다.

 

(1) 14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한글 성경은 하나님을 믿으니로 번역했는데 번역은 하나님을 믿고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구주를 보내줄 것을 약속해 왔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믿으라고 하신다.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유대인들은 단지 유대인들을 위한 구원으로 축소시켰다.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구주 메시야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기다려 왔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만을 보면 과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려 왔던 메시야의 자격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을 보면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당시 십자가 형은 최악의 사형틀이었다. 로마에 항거하는 자들에게 처해지는 것이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상징물이겠지만, 당시에는 실패한 반역자의 사형틀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따랐던 무리들 특히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여기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동요하지 말라는 의미다. 기대는 무너지고 두려움이 대신 엄습해 온다.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알고 따랐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 우리가 따랐던 예수, 그 분이 우리가 기다려 왔던 메시야 맞아? 분명 그리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사랑은 했겠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에 동요하지 말고 하나님이 구약에서 약속해 왔고 이제 그 약속이 예수님 자신 안에서 성취될 것을 믿으라 곧 예수님이 성경이 약속한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2) 제자들이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인지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버지 곧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 곧 독립을 위한 메시야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는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구주를 약속하셨을 때 그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 곧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불렀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이 사는 길임을 선포할 사명을 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만을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했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하셨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교회를 불러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을 세상에 알리도록 하셨다.

(3)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에게 하나님나라에 거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14:12)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벽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가는 길은 어떠한 장애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고 말씀하신다. 이에 도마가 그 길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말씀하신다.

오직 예수님만이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 가는 길이 사는 길이다. 생명을 얻는 길이다. 영생의 길이다. 생명이란 하나님을 만나 함께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원함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서 하나님께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4) 이제는 빌립이 나선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보여주라고 요구한다. 이에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본 자는 이미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본 자라고 하신다(14:9). 왜냐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은 도마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20:28).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이제부터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보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성령님이 오시면 그때야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신다.


김성철목사의 요한읽기 29

 

보혜사 성령 14:16-31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과 같은 메시야(그리스도)로 알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니 도저히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에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보혜사를 거론하신다. 첫째는 예수님은 가고 없지만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시면 그 보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시켜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don’t worry, be happy가 되겠다.

 

보혜사(保惠師)

 

한글 성경에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여러 가지 용어로 번역되고 있다. 협조자(공동번역), 보호자(가톨릭성경), 영어성경에서는 Comforter (위로자. KJV) Counselor (상담자. NIV), Helper (돕는 자. ESV, NASV)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보혜사를 한자의 의미 그대로 풀면 보호해주면서 은혜를 베푸는 선생이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파라(곁에)’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 곁으로 부름을 받은 자. 이 단어는 당시 법정 용어다. 원고의 변호사로부터 추궁을 당해 곤란을 당하고 있는 피고인을 도와 줄 목적으로 피고인의 가장 친한 친구를 불러 피고인의 곁에 있게 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 친구를 파라클레토스라고 한다. 그래서 이 친구가 피고인에게는 큰 위로가 되기도 하고 피고인을 변호해주기도 하므로 돕는 자가 되기도 한다. 15:15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그런데 파라클레토스보혜사로 번역할 때 친구가 아닌 스승 ()’를 사용한 것은 14:26에서 보혜사가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는 것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예수님 역시 보혜사이셨다. 15:15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자들뿐 아니라 나사로도 삭개오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친구로 대하셨다. 그러나 말씀을 하실 때는 언제나 선생이셨다.

왜 예수님은 법정 용어를 사용하셨을까? 17장에서 예수님이 중보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이 세상에서 지켜지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이 주어진다.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단순히 핍박한 것이 아니라 법정에 세웠다. 예수님도 당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소당해 법정에 세워졌고, 사도 바울도 고발을 당해 결국 로마법정에 서게 된다. 마태복음 10:17-19을 보자.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제자들 스스로는 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보혜사가 곁에 돕고 계신다. 누가 이기는 판결을 받는가? 16:33에서의 예수님의 승리 선언이 나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예수님에게 붙어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의 이야기는 14장 말미에서 시작해서 16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5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진리의 영, 성령 하나님

 

그럼 또 다른 보혜사는 누구인가? 14:17에서 진리의 영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14:26에서 분명하게 밝히시고 계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6:13에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 자신들이 원래 했던 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성령님이 오실 것임을 약속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명하신 것은 하나였다. “성령을 가다리라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고아와 버려두지 않고(14:18)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8:20). 어떻게?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러기에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14:2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평안이 함께 주어질 것이다. 14:18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평안이란 용어가 20:19,21에서는 평강으로 번역되었다. 영어로는 ‘peace 평화. 이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단어는 마음의 근심(동요)과 두려움의 반대어로 쓰였다. 왜 마음의 동요와 두려움이 생기는가? 그것은 갈등의 문제이다. 곧 평안 또는 평강은 갈등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 평안(평강)을 성령님과 동일시한다(20:22). 성령님이 마음에 들어오시면 더 이상의 갈등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나 넓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갈등이 없다. 곧 선택의 갈등이다. 갈 길은 정해졌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제자들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하나님이 임하자 갈등은 없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핍박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성령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 전에 말씀하신 이유를 14:29에서 밝히신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이후 두려움으로 흩어지면서도 무엇인가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활이 있었고 승천이 있었다. 무엇이지? 눈으로 보긴 보았는데 죽음 부활 승천 왜? 알 수 없었다. 답답했다. 그러나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시자 눈에 보는 듯이 알게 되었다. 마음의 근심 대신에 마음의 확신이, 두려움 대신에 용기가 마음을 채웠다. 더 이상의 갈등은 없었다. 평안 또는 평강이다. 성령님을 받은 자만이 누리는 복이다.

 

또 다른 보혜사

 

여기에서 쓰인 또 다른은 같은 것 또 하나를 말한다. 영어로는 another이다. 커피를 먹고 나서 같은 종류의 커피를 먹을 때 쓰는 것이 여기에서 쓰인 또 다른이다. 영어의 other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을 말한다. 커피를 마신 다음 콜라를 먹는 것이 ‘other의 다른이다

예수님이 보혜사이시다. 그리고 예수님과 전혀 다른 보혜사가 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령님 역시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이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인격적으로는 세 분 하나님인데 이 세 분 하나님이 하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함은 성부 성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이야기와 같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예수님과 같이 인격적 실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령님 역시 탄식하시고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기도 하신다. 단지 영적 힘이 아니다. 인간이 성령님을 주었다가 거두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결정은 성령 하나님이 하신다. 성령님 역시 인격체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 역시 우리들을 가르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시키시고 알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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