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0
예수나무에 붙어 있으라 : 15장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핵심은 성령님이시다. 3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이 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냐면 그들이 원하는 기대감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움직이기 위하여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정말이지 어이없이 예수님이 잡히자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에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인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4장에서 16장까지다.
15장은 14장과 16장과 관계없이 읽으면 예수님의 7번째 자기 선언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의 일부분임을 알 수 있다. 15장 역시 성령 이야기로 끝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성령님은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에게 오신다
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였을까? 아마도 길을 가시면서 포도나무 넝쿨을 보셨을 것이다. 단지 이유는 그거다. 감람나무로 비유하였든지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였든지 상관은 없었다. 어떤 나무가 되었든지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아궁이의 불소시게로 전략하게 된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을 때 가치가 있다. 예수님은 나무 자체고 제자들은 나무의 가지다.
이왕 포도나무를 가지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비유하였으니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인 포도로 만드는 포도주가 당연히 연상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흥겨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였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사건이다. 사람들은 더 좋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혼인잔치의 분위기는 더 큰 기쁨으로 차 있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포도나무되시는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농부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가지는 쳐내야 한다. 쳐냄을 당한 가지는 포도 한 알도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도 가지치기 당할 수 있나? 염려할 필요 없다. 열매 맺을 수 없는 가롯 유다는 이 자리에 없다. 남아있는 11제자는 이미 깨끗한 자들이기에 가지치기 당할 염려가 없다. 그냥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열매는 맺게 되어 있다. 16절에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가지가 나무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감사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받는다고 한다. 오해하지 말자. 포도나무의 가지가 맺는 열매 는 포도다. 포도나무 가지면서 사과나 배가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사과나 배가 열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라는 열매를 얻는다. 단지 좀더 충실한 포도 열매, 먹으면 떠 먹고 싶은 포도 열매를 구하라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가지는 우리 자신이다. 내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내가 아닌 남이 따 먹는다. 남을 복되게 한다. 열매를 먹고 즐거워하는 그 모습을 보고 내 기쁨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그럼 어떤 열매인가?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니 당연히 예수님이라는 나무의 가지가 맺는 열매의 이름은 성령의 열매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착각하지 말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9종류의 다른 열매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한 종류다.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열매가 9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사랑을 언급하신다. 예수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사랑이라는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요한일서 4:8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 자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 자체가 사랑이다. 예수나무는 사랑나무다. 그러니 사랑나무의 가지는 사랑열매를 맺는다.
예수 안에 거하라
그렇다면 예수나무에 붙어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예수님은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계명으로 나타난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다. 9절에서는 아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는가?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는가? 그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나라 백성 삼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딱 한가지만을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왜? 우리는 항상 그 질문에 답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안고 세상을 향해 가라고 명하신다.
성경에서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온 강도 만난 자이다. 강도만난 자는 유대인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를 외면할 수는 없다. 또 싸우더라도 일단은 살려놓고는 보아야겠다 싶어 사마리안은 원수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다. 원수가 이웃이 되는 순간이다.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하라. 그 원수가 친구가 된다.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라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신다. 종에게는 명령만 하지 왜 그러한 말씀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자세히 설명해 준다.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 뜻을 알려주신다.
미움도 받는다
사랑으로 다가가도 세상은 받지 않는다. 세상은 예수님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싫어해도 예수님이라는 인간은 좋아한다고?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은 자신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안다면,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되신다는 복음을 듣는 순간 세상은 예수님을 버린다. 이에 대해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러하니 복음을 들고 외치는 예수님의 증인된 자들을 세상은 미워한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두 증인이 죽자 세상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한다. 그만큼 세상은 성경을 싫어한다. 세상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외침이다. 세상은 성경은 하나의 학문으로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영적의 의미로 가르쳐지는 것을 싫어한다. 사도행전에서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상하게 여긴다. 전에는 죽을까하여 도망하기에 바쁘더니 이제는 죽음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고 묻는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다. 성령님이 임하자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았고 그 십자가가 바로 자신들을 구원하였다고 믿게 되자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다.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신 것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요한복음 6장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하고 여젼히 예수님에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예수나무의 가지로 붙어있으라. 그리하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면 알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알리라!
김성철목사의 요한읽기 31
예수님의 성령론 : 16장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자 할 때는 요한복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성령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14장에서 보혜사 성령님이 거론된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고 15장에서 말씀한다. 그리고 다시 성령님을 거론한다.
요한복음 16장은 유대인들로부터 당하는 환난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였노라고 선포하면서 마친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여기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복음전파에 있다. 그런데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해야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이해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 선언
16장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직접 선언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16:15) 아버지(성부 하나님)는 인간 구원에 관한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님(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흥함(천국. 영생)과 패함(지옥. 영벌)의 기준이 되셨다. 곧 하나님 심판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바라는 자들이 믿어 구원받게 하는 일을 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아 알게 하여 믿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지게 하신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논리로 내가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지식으로는 경험으로는 논리로는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믿어지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떠한 인간의 논리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나를 믿어지게 하신다.
진리의 성령
성령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일은 요한복음 16:13에 나온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 하나님의 일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진리란 무엇인가와 그럼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일이다.
진리에 대하여는 14: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진리란 길이다. 어떤 길인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진리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의미한다. 사람을 살리는 길이 진리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길은 아버지 곧 창조주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길이 진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인도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신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하나님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생명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베드로전서 3:18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왜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는 알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다. 하나님께 타락한 인간을 인도하시는 진리되신 예수님께 인도하시는 일을 성령 하나님이 하신다. 당연히 생명을 얻게되는 진리는 성경 안에서 얻게 된다.
성령 하나님의 일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영생을 얻게하는 성경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경으로 인도하는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타락한 인간이 영생을 얻게 하는 일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곧 진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타락한 인간에게 3가지의 것으로 책망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
(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16:9) 인간이 저지른 근본적인 죄는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고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하나님은 살아있음을 알리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함을 계시하셨다. 타락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음을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선포하신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2)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6:10) 타락한 인간이 사는 길은 창조주 하나님과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구원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다 이루었다.”(19:30) 하나님을 만날 길을 완벽하게 열어놓으신 예수님은 이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제 성령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 때문에 필요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하신다.
(3)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6:11) 구원에 대한 인간의 논리는 행위로 인한 구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위적으로 완벽하게 되는 길을 추구해 왔다. 지금 이 세상에서 행위적으로 불완전하다면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서 자신의 씻어지지 않은 악업을 없애고 선업을 쌓아 완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결코 행위적으로 완전해 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 곧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죄의 사함을 받는 길이다고 성경은 선포한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열어 놓으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영생과 영벌이라는 심판의 기준이 되셨다. 인간의 구원방식 곧 행위구원은 이미 그 행위자체로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그 자체로 이미 심판을 받았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세상 임금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사탄 마귀의 일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기쁨의 충만
성령님은 오시면 진리를 알게 된다. 그래서 영생을 얻은 기쁨을 우리는 누리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영생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환난이 예고된다. 예수님을 믿기에 주어지는 환난을 견디어 내기에는 힘이 든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주어지는 기쁨의 충만을 약속하신다. 환난 가운데서도 구원 받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21절에서는 이 기쁨을 해산의 기쁨으로 비유하신다. 누가복음 11:13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성령님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사도행전 1:8은 말씀하고 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는 앞으로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이겨버린 싸움을 마쳐야 하는 자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은 충만하게 될 것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3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 17장 (1)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중보자 기도로 알려져 있다. 언제부터인가 중보기도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의하기를 중보기도란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한다. 이 용어는 디모데전서 2:1에서 나왔는데, ‘도고’라는 단어를 새번역성경에서 ‘중보기도’로 번역하는데서 기인한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2:5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구절이 나온다. ‘중보’라는 말을 더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다면 ‘중재’이다. 단순히 남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기도가 중보기도이다. 그래서 중보자로서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사람은 결코 중재자가 될 수 없다. 단지 남을 위하여 기도로 간구 또는 간청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이 하는 기도에 중보기도라 함은 잘못된 용어이다. 성경에 있는데로 ‘도고’라 함이 옳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1)자신에 관한 기도 (2)제자들에 관한 기도 (3)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다. 이번 호에서는 자신에 관한 기도(1-5절)만을 다룰려고 한다. 여기에는 용어의 개념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영화롭게 하다 (영광)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사야 43:7은 선언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요한복음 17:1-5에는 ‘영화롭게 하다’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하고 6절 이후에는 ‘영광’이라는 단어로 2번(10,22) 등장한다. 여기에서 영화나 영광은 같은 의미이다.
고린도전서 10:31을 보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로마서 3:23은 어떠한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선언한다. 종합해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못한 삶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원래의 삶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가장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의미다.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느 때에 기뻐하시는 가? 창세기 1장 천지창조로 돌아가 이야기 해 보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그래서 이어진 표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마무리 한다.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가 곧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 주어진다.
예수님의 일
(1) 예수님이 가장 본질적인 일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다.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때’에 대한 이야기가 가나혼인잔치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직은 때가 안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이제는 이룰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이야기 하신다. (1)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것과 (2)그렇게 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원하신 바의 일을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이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원하신 바의 일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이다. 당연히 그 결과로 기뻐하심을 받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요약하고 있다.
(2) 그럼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2절에서 밝히고 있다. 곧 영생을 인간에게 주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선언한다. 쉽게 말하면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예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2:34에서는 시므온의 입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요한계시록 1:1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에게 주셨다고 선포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다.
(3)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이란 참 하나님과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지식적인 앎에서 체험적인 앎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공통적인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다. 참 하나님은 어떻게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지식이다. 그리고 배워서 알게 된 지식으로 인해 아는 것만큼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를 요한복음 5:24에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로, 요한복음 6:29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다. 이렇게 요한복음 앎과 믿음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2:24에서 믿음이란 ‘의탁함’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쉽게 말하자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것 곧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 3:18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롭게 하다라는 동사가 전부 과거형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영화롭게 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화롭게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미 이룬 것과 같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과거)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과거)”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이 하고 있으니 이는 이미 이룬 것이다. 누가복음 2:14을 보자. 예수님이 태어나시자 천사들이 찬양하는 소리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은 이미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5절이다. 하나님의 인간구원계획은 “창세 전에 내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화”라고 말씀하고 있다. 창세 전부터 성자 하나님도 인간구원계획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인간구원을 계획했을 때부터 하나님은 영광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전능한 자라고 선언하신다. 곧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니 하나님이 마치실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예수님이 이루심으로 영화롭게 되셨다. 곧 기뻐하셨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예수님의 자기에 대한 기도는 창세 전에 계획되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인간구원계획이 실제화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또는 중재자로 자리매김했음을 선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