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1- 하나님의 구원계획

by wgma posted Dec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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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복음 읽기 41

 

내 양을 먹이라 - 요한복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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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 제자들에게 준 사명 복음전도는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것으로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양자로서의 사명을 말하고 있다. 이는 10장에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는 예수님의 심장을 말씀하는 것 같다. 복음은 양을 치는 목양자의 심정으로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러한 목양자의 심정이란 어떤 것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다.

(1) 첫 번째 질문은 비교하면서 묻는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에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사랑의 대상자로서의 비교로 어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 또는 다른 무엇들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이고, 세 번째로는 어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이다. 무엇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느냐이다.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는 비교함 없이 베드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가고 묻는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의 원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그 일을 한다. 자신의 일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 우선시 되게 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2)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아람어였다. 아마도 사랑이란 용어를 같은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용어를 다르게 사용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아가페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베드로는 필로한다고 답한다. ‘아가페는 그저 주는 사랑이다. 그래서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가페사랑 이외에 주어지는 인간들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히시기 전에는 누구 못지않게 예수님을 아가페사랑을 한다고 믿었다. 예수님이라면 생명이라도 내어놓기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베드로는 아가페사랑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어떤 상항을 만나면 인간으로서 자신이 없다. 베드로는 필리아사랑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이 또한 자신을 얼마나 아가페사랑을 주셨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은 약한 자 시몬입니다. 언제든지 상항에 굴복할 수 없는 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시잖아요?’ 베드로는 사랑하는 일 조차도 예수님께 맡기고 있었다. 사랑하긴 하지만 상항에 굴복하기 쉬운 인간이기에 베드로는 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에서는 베드로와 같은 필리아사랑으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필로하느냐?”고 묻는다. 예수님이 세 번째 질문에서 베드로와 같은 단어의 필리아 사랑을 사용한 이유는 베드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안다. 베드로 너의 마음을 안다. 너의 사랑을 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내가 흔들리기 쉬운 시몬을 반석같은 베드로로 만들어 줄 것이다.’

(3) 여기에 또 하나의 미묘한 변화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안다는 단어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을 예수님이 안다고 답한다. 첫 번째 와 두 번째 아시나이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눈에 보는 듯이 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 동안 나 베드로를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내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눈에 보듯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 번째 사용된 단어는 경험적으로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이다. 이는 깊은 관계를 통한 앎이다. 세 번째 예수님이 사랑하느냐고 묻자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예수님 그 동안 함께 지나오면서 단순히 곁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함을 경험적으로 아시지 않습니까?’ 이는 베드로의절규에 가까운 사랑함의 고백이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듣는 이유는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 대한 책망이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했으니 그 사랑을 갚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아가페사랑에서 필리아사랑으로의 변화를 보았다. ‘나는 너 베드로를 끝까지 죽기까지 아가페사랑했다. 그 아가페사랑을 내게서 너 베드로는 받았다. 그러니 그 사랑은 이렇게 필리아사랑으로 갚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게? 아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물과 같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예수님께 갚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했던 것 같이 내 양에게 그 사랑으로 먹이고 치라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갚는 것이 아니라 흘러 보내는 것이다.

(2) 여기에 예수님은 내 양곧 예수님의 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보내신 사람들이다. 목양자가 가져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양을 관리하는 자로서의 목양자이다. 내가 전도했으니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닌 것이다.

(3) 성경은 왜 그 많은 가축 가운데 성도를 으로 비유하는가? 양이 가지는 특징이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을 양처럼 다루라는 이야기다. 목자만을 따라가는 양이다. 목자가 잘못하면 양도 그 잘못을 따라간다. 길을 잃어버리면 양은 제 집을 찾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는 목자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읽는다.

 

자신의 일만 성실히 하라

 

진정한 자유는 자신을 위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절제하는 자유이다. 진정한 권력은 자신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의 권력을 자제하는 것이다. 참된 목양자는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예수님이 맡겨준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으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고 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할 것을 말씀하신다. ‘네 팔을 벌린다이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든지 받아들이는 모습을 말한다. 이제까지는 싫고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누구에게라도 복음을 전해야 하고 누구든지 믿고자 하는 자에게는 팔을 벌려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그 자가 당시에 매국노로 취급받은 세리가 되었든지 죄인 취급을 받던 창기라고 받아들이므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예수님과 같이 비난을 받더라도 복음은 누구에게라도 전해져야 하고 누구라도 믿고자 하는 자에게 찰을 벌려야 한다. 그렇게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말하고 있는 요한에 대하여 묻는다. 예수님은 이에 22절에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이 말에 대하여 요한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요한이 순교를 하든지 자연사를 하든지, 일찍 죽든지 오래 오래 살든지 베드로가 자신과 비교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베드로는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는 의미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성실히 먹이고 치는 것이 목양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제까지 기록한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사실임을 밝히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려면 끝이 없겠지만 요한복음의 목적 곧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에 맞추어 충실하게 기록하였다고 기록하고 요한복음을 마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

 

하나님의 구원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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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앞으로 오실 구원자 예수님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도전하였던 인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사 인류를 구원할 구원주를 보내기로 계획하셨다. 창세기 3:15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음이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유혹했던 뱀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는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밝힌 최초의 복음이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

 

(1) 구원자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오실 구원자는 사람으로 오신다는 의미다. 왜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 했는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공의라는 말은 재판정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죄는 죄로서 다루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다. 반드시 죄값은 치루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럼 어떻게 죄값을 치루는가? 창세기 9:5-6이 답한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사람이 범죄했으면 사람이 그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3:23은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를 내린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물론 이는 인간끼리의 도덕적인 죄도 포함된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죄를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죄든지 인간끼리 서로간에 범하는 죄가 되었든지간에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평가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이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구원자가 사람으로 오시게 되는 이유다.

갈라디아서 4:4-5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예수님에 관한 구절이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이 여인에게서 나셨다. 곧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앞에서 누구나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자들의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룸으로 인간은 죄로부터 구원받아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그것도 종이 아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아들로서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

 

(2) 마태복음 1:1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것도 이스라엘의 왕의 계보를 잇게되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데 중요한 계보를 이어보면, 아담, 노아, 셈 그리고 아브라함, 다윗의 후손 예수님으로 이어진다.

인물구속사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계보를 따라 전개된다. 물론 모두를 다루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조상들만이 대상으로 주어진다. 로마서 1:3은 구원자의 혈통에 대하여 말씀한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형통에서 나셨고성경은 앞으로 오실 구원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예수님의 조상들로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왜 이들은 중요한가? 인물구속사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승리자

 

(1)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고 있는 구원자의 출현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사탄은 구원자의 출현을 막고자 했다. 요한계시록 12:4을 보자.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성경의 기록을 보자.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창세기 4),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세기 6:2). 이는 사탄은 구원자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자들을 핍박 또는 타협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사탄은 먼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유혹하였다. 그리고 창세기 11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벨탑 사건은 인간 전체의 교만을 그리고 있다. 사탄은 핍박과 타협 그리고 인간의 교만등을 통하여 구원자의 출현을 방해하고 있었다.

 

(2) 그러나 창세기 3:15에서는 마침내 구원자가 출현하여 사탄의 궤계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이 완성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인물구속사에서 다룰 인물은 바로 구원의 승리를 이루어 내는 예수님의 모형되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단지 예수님의 조상되는 자들 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틀에서 보게 되는 인물들을 다루게 된다. 요셉과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같은 자가 대표적이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사

 

(1) 성경의 인물을 다루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믿음의 모델로서 다루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구원의 관점에서 성경의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다. 인물구속사에서 다루게 될 인물 이야기는 구원의 관점에서만 다루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처음부터 전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밝혀진다. 예수님의 출현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인간구원 계획은 비밀이 아닌 비밀로 곧 복음으로 인간들에게 선포된다. 인류의 대포자로서의 아담으로부터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였던 요셉에 이르기 까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밀하게 전대된다. 이러한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러한 인물의 일회적인 위대함이 아니라, 구원의 선을 그러가는 구속의 역사를 읽게 된다. 그래서 인물 구속사다.

 

(2) 성경에는 철학과 문학 그리고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역사와 과학을 논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간구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다. 디모데후서 3:15을 보자.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 곧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도 100% 알려주지 않는다. 성경이 100% 알려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도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를 다룬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구원에 연관하여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구원외의 것에 대하여 100%로 다 알려는 것은 어리석은 노력이다.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도 다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만을 선포할 뿐이다. 구원의 관점에서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인물들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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