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3
아브라함의 복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1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메시야로 등장할 예수님은 다윗과 같은 왕이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는 왕의 족보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예수님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창세기 12:3은 이렇게 기록한다.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모든 인류를 복되게 하시는 자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아브라함은 앞으로 인류의 구주를 태어나게 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바벨탑사건 이후 모든 인류는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갔고 마침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인류 가운데 하나님은 한 사람을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셨다.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가? 아브라함이 선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으로 위대해서? 아니다. 성경의 답변은 이러하다.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은 것을 아브라함에게 찾지 말라. 아브라함에게서 찾는다면 거기에는 답이 없다. 답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그의 후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신 것이다. 그게 전부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적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르심으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는 한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바벨탑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 성경이 선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풀어서 이렇게 선언한다.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계획 구원의 방식을 따라 구원은 주어진다. 인간구원을 위한 구주를 보내실 토대로 준비되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라함의 행적에 있어서 유일하게 일관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다. 이를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창세기 12:4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에 아브람(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어떨 때는 믿음의 사람으로 보였다가 어떨 때는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하였고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과 관계를 맺어 이스마엘을 낳았다가 하나님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공통되게 일관되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해 창세기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속은 아직은 드러나 있지 않다. 앞으로 그리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약속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아브라함과 계속해서 함께 하며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따르겠다고 하시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사명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창세기 12:3은 이렇게 밝힌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목적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타락한 모든 인간에 복을 주고자 함이다. 창세기 12:2에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복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아브라함에 주어진 사명이다.
여기에서 기록된 ‘복’이란 본래의 의미는 ‘무릎 꿇다’이다. 이를 풀어쓰면 무릎을 꿇어 누군가로부터 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이 ‘복’을 강조할 때는 복의 내용보다는 누가 복을 주는가에 있다. ‘복’이란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런데 ‘복’을 기록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라고 하며 복을 주는 자를 극대화 한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세기 12:3)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 아브라함은 복의 사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복의 내용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해 버린 것이다. 참으로 복을 주시는 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사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민족 신으로 숨겨버렸다. 하나님은 이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을 교회로 옮기셨다. 교회가 이 사명을 잊어버린 순간 교회가 존재할 이유를 상실해 버린다.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은 임마누엘이라고 선언한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다(마태 1:23). 누가복음에는 시므온의 입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누가 2:34)고 선언한다. 이를 창세기 12:3에 따르면 예수님을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이 주어질 것이요 예수님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저주하리라는 것이다.
떠나 가라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아브라함에게 익숙한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떠나야 한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이다. 아비는 우상을 만들어 돈을 번 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우상의 세계를 떠나라고 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한다. 하나님이 보여 줄 땅이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나라의 상징적인 나라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나안에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산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우상의 세계를 떠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삶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이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도 그러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복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4
아브라함의 약속에의 보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과 가나안이 아브라함 후손들의 땅이 될 것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 자신은 오직 한 가지 약속만을 보았다. 그것은 약속의 아들을 얻은 것이었다. 땅에 대한 약속은 훗날 이루어질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4가지 약속이 있다. 가시적인 약속은 두 가지다. 자손과 땅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또 하나의 약속이 있다. 창세기 12:3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안식에 대한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장소를 옮길 때마다 제사 곧 예배를 드리는 장면을 본다. 이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에 대하여 복이 되라는 사명을 주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자손과 땅 그리고 안식과 예배,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약속의 내용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 또한 안식이 주어지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의 목적을 가진다.
구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4가지 약속들이 차례대로 성취되는 것을 본다. (1)후손에 대한 약속은 출애굽기 12:13에 보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장정만 60만명이라고 했으니 그 외의 수까지 생각하면 적어도 200백만명이 넘었을 것이다. (2)땅에 대한 약속은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성취된다. (3)땅을 가졌으나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안녕할 수가 없었다. 이민족들의 약탈 때문이었다. 특별히 블레셋과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벌었다. 여기에 다윗이 등장한다. 다윗 왕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안식을 누린다.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4)이제 성경의 주제가 바뀐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목적이다. 그것은 예배다. 성전 이야기다. 성전 이전의 것은 성막이었다. 성막은 천막과 같은 형태의 것이었다. 다윗이 나라를 굳건히 세우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원했으나 성전건축은 솔로몬에게 주어진다.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은 왕이 성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게 되었다.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은 바벨론 침공 때 무너지고, 스룹바벨의 손에 의해 재건된다. 그리고 헬라시대에 다시 무너졌다가, 예수님 당시 헤롯이 세 번째 성전을 지었는데 63년에 완공이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70년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그 후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제사예배의 종언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영원한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다시는 제사를 반복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믿음이었다. 창세기 15:6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신 첫 장면에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한다. 창세기 12:4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는 믿음에 따른 아브라함의 행동이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 이삭과 관련하여 전개된다. 창세기 12장에서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되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서 언약을 확인한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 언약의 골자는 아브라함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가 없는 상태였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는 점차적으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난 자녀가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로 속이는 일을 두 번이나 한다. 조카 롯이 다른 부족들과 싸워 포로가 되자 롯을 구출한 후에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을려고도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때 나이가 75세였다. 그리고 80 후반기에 접어들어도 자녀가 없자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스마엘, 오늘날 아랍민족의 조상이 된 자였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무척 진노하셨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보이라고 책망하신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겼다. 단지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했을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이 소중한 아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한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17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이삭은 죽지 않았고 이삭 대신 숫양이 대신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아브라함 이야기는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야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아브라함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으며 만나주시겠다는 선언이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보증
약속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는가? 다시 질문하자.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인가 약속하시는 하나님인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왜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거리는가? 그것은 약속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믿음이 견고해진다.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선언하고 있다. 성경에서 ‘전능하다’는 의미는 말씀한대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성경은 인간에게 결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인간은 전혀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 당신이 착하다고 하나님은 복을 주셔야 하는가? 그 누군가가 악하다고 왜 하나님은 징벌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며 오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함과 악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반대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100%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셨기에 인간은 그 하나님 뜻 안에 놓이게 된다. 그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모든 인류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두 갈래 길이다. 믿고 천국에 갈 것인가, 믿지 않고 지옥에 갈 것인가? 왜 착하게 살았는데 지옥에 가느냐고 묻는 것은 구약성경 욥이 범한 잘못이다. 욥은 자신 만큼 의롭게 산 자가 어디 있길래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는가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엄청난 질문을 받고 아무 답도 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무지함을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뜻을 정하시고 말씀하심으로 약속하셨기에 하나님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을 돌려보자. 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보증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약속에의 보증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아브라함 자신의 살아생전 그 약속을 보진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들은 후손의 시대에 차례대로 이루어졌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5
이삭의 화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론이다. 그것은 순종이다. 아브라함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이를 히브리서 11:1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렇다. 믿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가 되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묶고 단 위에서 죽을 위기에도 아버지의 하는 일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보인 순종하는 자의 표본이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제단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채로 하나님께 믿음의 자세를 보였던 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브라함 이야기와 결부시켜보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결론이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이를 야고보서 2:26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함으로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이삭 그 자체의 삶으로만 말해 보자. 이삭의 화해의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도 무너진 관계의 회복 곧 화해이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 곧 화해였다.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 한 가지만 들라면 무엇인가? 그것은 화해다. 마태복음 5장에 등장하는 팔복은 기독교인의 인격을 다루고 있다. 팔복의 핵심은 바로 7번째 “화평게 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간 구속사는 하나님의 인간과의 화해, 그리고 이어지는 인간끼리의 화해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파괴된 관계가 화해를 이루어 서로의 관계가 회복될 때 거기에서부터 행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화해의 사람 이삭
이삭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닮아 있다. 그렇게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그렇게 이삭의 삶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화해다. 이삭이 보여준 화해의 사건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1) 창세기 26장에 보면 우물 사건이 등장한다. 물이 귀했던 곳에 우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복이었다. 이삭이 너무 잘 되는 것을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워 버리고 그 지역을 떠나라고 하자 이삭은 자리를 옮겨 우물을 파자 다시 메워 버린다. 그래서 지역을 또 옮겨 우물을 두 번 이나 더 수고하여 팠으나 그때마다 다툼이 일어난다. 이삭은 어떤 경우라도 다투는 것을 싫어했다. 우물을 빼앗기는 것은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다툼없이 살기를 원했다. 다투기 보다는 장소를 옮겨 또 필요한 우물을 팠다. 마침내 다툼이 멈췄다. 다툼을 멈추고 우물을 내 주고라도 회해하며 살기를 원했던 이삭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을 지켜 보아온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화해를 청하며 서로 다시는 다투지 말 것을 약속했다.
(2)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가 가져야 할 축복을 대신 받음으로 해서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창세기 27:41)다. 아버지 이삭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동생 야곱을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서로 화해 한 것을 본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이삭은 서로 미워했던 형제를 화해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3)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삭 이야기의 극적인 화해 사건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를 화해시킨 사건이었다. 이삭은 이 사건에서 화해의 아들이었다. 100세에 이삭을 갖게 되자 아브라함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한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제단에 필요한 나무는 있는데 정작 중요한 제물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준비된 제물이 있노라고만 말하자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만들고 아들 이삭을 결박한다. 이삭은 여기에서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결박을 당하고 제물이 되는 것에 순응한다. 이삭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서로 화해하는 제물이 된 것이다. 성경은 이를 화목제라고 부른다. 결론적으로 이삭 대신에 숫양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이삭은 분명히 기꺼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화해를 위한 화목제로서 자신을 바친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화해를 이룬다.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이 이삭을 화해의 제물로 삼기 위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제지하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보게 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숫양을 가져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렸다(창세기 22:13).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한글 성경은 여호와 이레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고 번역하였으나, 킹제임스(KJV) 영어성경은 이를 “I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seen.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을 보게 되리라”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이레”라는 단어는 “라아”의 미완료 동사형이다. “라아”의 본 의미는 “본다”이다.
요한복음 8:56에거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본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언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인가? 바로 이삭을 화목제로 드린 사건에서 한 숫양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앞으로 죄인 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메시야(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와 이레의 의미는 “여호와의 산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가 바른 번역이다. 그런데 화목제로 바쳐질 인류의 구속자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준비되다”로 번역된 것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 화목제로 말이다. 이러한 화해의 제물은 성막 사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보여지고,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다.”(요한일서 4:10) 마치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이 제물로 드려진 것과 같다.
구약에서는 성전에서 죄를 위해서 반복하여 짐승을 제물로 드렸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브리서 9:28) 이 제사는 “영원한 제사”(히브리서 10:12)였다. 이제는 다시 구약식 제사는 필요없게 되었다. 이는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짐으로 다시 성전에서의 제사예배 종식을 선언하게 된다. 예수님의 단 한번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더 이상 제사 예배가 아닌 기쁨의 예배 잔치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표적을 보인 사건이 바로 가나 혼인잔치(요한복음 2장)에 참여하신 것은 이제는 예배는 잔치와 같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6
야곱의 성별
창세기 12-50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조상 이야기가 나온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에게 이야기가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브라함과 야곱 두 사람 이야기가 핵심을 이룬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삭으로 결론을 내고, 야곱은 성화에 초점을 맞추어 요셉으로 결론을 낸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름이 바꾸어진다. 아브람(높으신 아버지)은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이 되고, 야곱(발꿈치를 잡다)은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이 된다.
야곱은 이스라엘 조상 4인 중에서 특이한 경력을 가진다. 출발이 아름답지 못하다. 오히려 어떻게 이런 자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원함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자를 갖고자 하여 하나님을 찾았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쓴 자였다. 한마디로 움켜지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야곱은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것은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0~13)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문장이 나온다. “택하심을 따라”이다. 이는 성경구속사 흐름에 나타나는 중요한 문귀다. 하나님의 성별하심이다. 물론 야곱은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성별한 자 곧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결국은 성화 곧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성별의 역사
성별(聖別)이란 문자적으로는 거룩하게 구별시키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왜?”라는 질문이 따른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누구를 또는 무엇을 거룩하게 구별시켰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인간구원을 위해 이스라엘 조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성별시켰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별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두명이 있다. 한 사람이 욥이고 또 한 사람은 룻이다. 그런데 룻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기에 실제로는 욥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도 성경의 한 인물로 자리하고 있다. 욥은 당대에 의인으로 묘사되었고 그만한 믿음의 사람도 없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믿음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욥의 믿음은 고난의 순간에도 잘 정련된 금과 같은 믿음이었다. 욥과 아브라함은 동시대 사람이거나 욥이 아브라함보다 좀 더 빠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성별시켰다. 왜? 이유가 없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물을 만들어 돈을 버는 자였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 중에서 성별되어 구원자 예수님의 조상으로 성별된다.
그나마 이삭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님이 약속한 아브라함의 자녀였고 화해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모형이 된 자였다. 이삭은 동족으로부터 성별되었다. 야곱으로 이르면 참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 성경에 야곱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속이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야곱의 형 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야곱보다는 나은 자였음에도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유를 굳이 살펴보면 야곱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반면, 에서는 자신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별로 필요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곱은 그렇게 형제로부터 성별되었다. 야곱까지는 그런데로 이유를 대라면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야곱이 낳은 12 아들로 가면 어떠한 이유도 대만한 것이 없었다. 왜냐면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실제적인 이스라엘 지파의 조상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는 왜라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자로 여겨졌음을 감사할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성별되었음을 감사한다. 왜냐면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같이 믿음의 이중성과 현실에서 믿음의 실패를 맛보면서 결국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다. 이삭을 통해서는 화해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임을 보여주며, 야곱의 성별을 통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착해서가 아님을 보여준다.
성화의 길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면, 야곱의 이야기는 성화 곧 거룩해지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조상으로 성별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은 어떠한 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했던 자였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사게 되고, 어머니 리브가와 합작하여 나이가 들어 눈이 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가 가져야 할 축복을 취하게 되어 영 에서의 미움을 받게 된다.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결혼도 하고 자녀도 가지게 되지만 라반이 부려만 먹으니 야곱은 라반을 속여 재산을 불리게 된다. 결국 라반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야곱의 삶은 한마디로 움켜지는 삶이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주신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민족에게 대하여 복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복을 나눠주는 자가 아니라 복을 움켜지는 자였다. 야곱에게 있어서 복이란 들어오는 것이지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으로 야곱은 믿었고 그래서 장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만 되시면 복은 맡아논 것과 같다고 여겼다. 이면에서 야곱은 에서와 달랐다. 에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열심히 살면 부는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을 필요로 여기는 자에게 다가가신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모습이 계속 이어지면 문제다. 야곱에게 마침내 최대의 위기가 왔다. 그것은 외삼촌 라반을 속여 야곱이 부를 취한 것을 알게 된 라반이 야반도주하는 야곱을 쫓아왔다. 거기에다가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곱은 자기 특유의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뒤로도 가지 못하고 앞으로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한다면서도 자신의 잘 돌아가는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야곱은 멍하니 얍복강 모래사장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이 야곱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주셨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야곱 너와 나 하나님이 함께 하여줄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복이었다. 야곱은 자기 특유의 축복을 하나님의 천사에게 요구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축복의 삶을 누리고 싶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졌다. 여기에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또 하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은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조상이 된다. 얍복강에서의 사건은 야곱이 변화되는 시작에 불과했다. 야곱은 여전히 복을 움켜지는 자였다.
얍복강에서의 사건을 시작으로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들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 그리고 라헬이 낳은 첫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요셉의 동생 베냐민조차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면서 야곱의 신앙고백이 나온다. 그것은 “잃게되면 잃으리로다”란 고백이다. 마침내 야곱은 복을 움켜지는 자에서 복을 나누어주는 자로 바뀐다. 축복만을 원했던 야곱이 타인을 축복하는 자로의 전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사명 복주는 자의 사명이 야곱에게서도 시작된 것이다. 야곱은 이렇게 거룩한 삶을 이룬다.
야곱의 성별의 목적, 그리고 야곱의 성화의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각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라는 이스라엘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한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민족신으로 축소시켜버렸다. 하나님은 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계기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을 교회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인간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야곱은 복을 움켜지는 인생에서 남을 복 주시는 인생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야곱의 성별에서 보여주는 인간구속사의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