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7
유다의 왕권
인류의 구원자는 여인의 후손 곧 사람으로 오실 것을 창세기 3:15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노아의 세 자녀(셈. 함. 야벳) 중에서 셈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 하여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앞으로 오실 구원자가 어떻게 인류의 구원자가 되실 것인지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이삭을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된 양의 모습에서 보여주고 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리라는 약속은 예수님의 별칭인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이란 이름에서 나타나고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가질 것이며 구원자 메시야(실로)가 등장할 것이라고 계시되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10)
문제의 해결자 유다
찬양이란 의미를 가진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는 형제 중에서 흥미로운 삶의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자로 등장한 것이다. 당연히 피 흘리는 사건에게는 개입하지 않고 문제 해결은 언제나 살리는 길이 된다. 성경은 인간의 부끄러운 문제를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함으로 인간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늘 상기 시킨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여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외삼촌이면서도 장인이 되는 라반의 속임으로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 둘을 아내로 얻게 된다. 유다는 레아에게서 낳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첫째인 루우벤은 부적절한 관계로 인하여 야곱의 분노를 사게 되고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레아가 낳은 딸 디나 사건에서 상대방을 속여 피흘리는 일을 한다. 유다는 이 일에 빠져있다. 유다는 피흘리는 일에는 빠져 있고 오히려 피흘려야 하는 문제의 해결자로 등장한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는 라헬이었다. 라헬은 자식이 없다가 늦게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 첫째가 요셉(야곱의 11번째 아들)이고 둘째가 베냐민(야곱의 12번째 아들)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여 키웠다. 요셉은 자연히 형들의 미움을 사고 요셉이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심부름을 갔다가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큰 아들 루우벤은 그래도 동생인데 죽이기까지 해야하나 하고 고민하게 되지만 어찌 하지 못했다. 이때 유다가 방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종으로 파는 것이었다. 마침 미디안 상인이 지나가기에 유다의 방안을 들은 형제들이 요셉을 종으로 판다. 이 일로 요셉은 애굽으로 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요셉은 어찌 어찌하여 애굽의 이인자 총리가 되고 그때 흉년이 들었다. 야곱이 거주하는 가나안도 흉년을 비껴갈 수 없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풍년일 때 흉년을 대비하여 양식을 비축해 두고 있었다. 야곱도 아들들을 보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러 보낸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야곱은 라헬의 또 다른 아들 베냐민을 자신의 곁에 두고 사랑을 주었다. 한편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해서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한다. 야곱은 요셉도 잃었는데 베냐민조차 잃을 수 없다고 한다. 양식은 거의 떨어지고 다시 애굽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 야곱의 고집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선 자가 유다였다. 베냐민은 자신이 책임지겠노라고 약속한다.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볼모가 되어서라도 베냐민은 반드시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낼 것을 약속하면서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갈 수 있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대신하여”라는 말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아벨을 대신하여 셋이 주어지고, 이삭을 대신하여 양이 주어진다. 그리고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한다. 유다의 희생을 각오한 결단은 결국 가족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길이 된다. 요셉과 형제들과의 해후가 주어지고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유다는 씻을 수 없는 문제를 있었다. 그것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였다. 유다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유다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다말은 큰 아들 엘의 아내였다. 그런데 엘은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의 관습을 따라 유다는 장자의 아들을 얻기 위해 들쩨 오난에게서 다말이 자식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오난은 이를 싫어해서 바같으로 사정을 한다. 이로 인해 오난은 죽음을 갖게 되고, 막내 셀라는 아직 어렸다. 시아버지 유다가 팀나라는 곳에 가게 되자 그 길목에 매춘부 변장하여 기다리고 있었고 유다는 당시 홀아비가 되어있었고 그 매춘부가 며느리 다말인줄 모르고 관계를 맺게 된다. 다말이 임신한 줄 알게 된 유다는 다말을 죽이려했으나 임신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줄 알자 자신의 잘못을 바로 시인하여 다말로부터 후손을 보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은 유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유다의 후손이 다윗도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그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다. 다말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베레스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으니 곧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다.
유다에게 왕권이 주어지다
야곱은 유다에게 치리자의 축복을 하였다. 유다의 후손들은 유다와 닮아 있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12 정탐꾼을 보냈는데 이 중 10명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고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니 정복할 수 있다고 했다. 갈렙은 유다지파에 속한 자였다. 갈렙을 중심으로 유다지파는 가나안 땅의 가장 힘든 땅을 정복하게 된다. 유다지파는 언제나 힘든 정복사업에 앞장서는 지파였다.
가나안 땅은 외지인이었던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을 물리친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블레셋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사울 시대에 블레셋으로부터의 위기가 있었다, 이때 아직은 군인이 될 수 없었던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블레셋 장수와 싸워 승리하게 되는데 다윗은 사울의 시기를 받아 쫓기는 삶이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다윗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리고 블레셋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견고한 국가로 세운다. 이렇게 유다에게 주어진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비로소 안식을 준 왕이었다.
실로가 오기까지
야곱이 유다에게 주어진 치리자의 축복은 실러가 오기까지 였다. 실로는 메시야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3대 왕 솔로몬 이후 두 왕국으로 나누어진다.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늘 바뀌었다. 그러나 남 유다는 다윗의 후손으로 왕권이 이어졌다.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끌려간다. 이때 솔로몬에 의해 무너진 성전이 유다의 후손 스룹바벨에 의해 다시 재건된다. 포로이후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시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유다에게 주어진 왕권을 가지고 구원자로 죄인으로 판명된 인간의 문제 해결자로 등장한다. 죄인된 인간을 대신하여 그 값을 치루게 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 시대에 다시 무너지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헤롯에 의해 재건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전조차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지금까지 재건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더 이상 다윗의 왕권은 정치척 치리자로서의 역할은 끝이 났다. 예수님으로 인해 다윗의 정치적 왕권의 개념은 영적인 치리자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유다의 후손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스라엘의 치리자의 지파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다의 후손 다윗같은 왕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예수는 영원한 우리의 주님이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8
요셉의 형통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은 흠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들이었다.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알렸던 노아의 실수,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를 누이로 속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했던 시도, 야곱의 속임수, 그리고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오점, 성경의 인물들에게 나타난 잘못을 숨기지 않음으로 모든 인간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자로 그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은 죄에서 자신을 구원할 구속자의 필요성을 대두시킨다. 그러나 한 인물 요셉은 다르다. 성경은 요셉에게 있어서만큼은 잘못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있다면 형들의 행위를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하는 정도다. 왜 요셉만큼은 예외적으로 다루는가?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많이 닮아 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게 되지만 결국 가족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자가 된다. 어떻게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가?
청지기로의 삶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삶에 있어서 언제나 2인자로서 살아갔다는 점이다. 한번도 일인자로 살지 않았다.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편애와 요셉의 꿈으로 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자 형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 집안의 종이 된다.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은 요셉은 보디발 집안의 총무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가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으나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간수들의 인정을 받아 감옥 안에서는 자유로운 자가 되어 감옥 안에서 간수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된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고 꿈을 해몽하는 자이기도 했다. 당시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의 꿈을 해몽하였는데 그대로 되고, 애굽의 통치자 바로의 꿈을 해몽해 줌으로 일약 애굽의 이인자 총리가 된다. 바로의 꿈은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훙년에 관한 것이었다. 요셉은 앞으로 주어질 일들을 관리하는 자로 바로로부터 총리 임명을 받는다.
이러한 요셉의 생애를 보면 한번도 주인으로서 산 적이 없었고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삶을 산 것으로 등장한다. 성경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함을 받았으나 인간은 청지기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고자 함으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를 통해 창조시 주어진 인간 본연의 삶 곧 청지기의 삶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바로 다스리며 사는 삶에 대한 기도가 주기도문에서 보여진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음을 밝히고 마침내 자신이 아닌 아버지가 원하던 일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다.
형통한 자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오해되고 있는 용어가 형통이란 용어이다. 물론 형통이란 용어를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잘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용어를 내가 잘 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형통이란 용어가 요셉의 삶 속에 등장한다. 그것도 요셉의 가장 고통스런 삶 속에서 등장한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총무로 일할 때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형통이란 용어는 요셉의 자유로운 삶과 연관이 있다. 그 자유는 주인 보디발이 허용아래 주어진 것이였고, 감옥 안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디발의 눈과 감옥의 간수들의 눈에 들어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자유였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게 되었을 때 요셉은 단호하게 그것은 허용된 일이 아니라고 거절함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게 된다.
형통이란 용어는 다스리는 삶과도 연관된다. 요셉에게는 언제나 다스리는 일이 주어진다. 보디발 집안을 다스리는 총무로, 감옥에서 간수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여 처리하는 자로, 그리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의 왕 바로의 일을 대신하여 애굽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다스리는 자는 자유롭게 판단하고 느끼며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자신의 판단에 의해 행할 수 있는 다스리는 자의 형통함을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형통이란 용어가 복이란 의미와 만났을 때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경은 남을 복되게 하는 자가 형통의 의미라고 푼다. 보디발 집안이 요셉 때문에 복을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언제나 자신이 자유롭게 행하던(다스리는) 일들을 통해 요셉의 유일한 윗 사람 주인(일인자)를 복되게 하는 자로 등장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보디발 집안을 복되게, 그리고 감옥의 간수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의 영역을 넓혀주게 된다. 마침내 요셉으로 인하여 아버지 야곱의 집안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된다.
남을 복되게 하는 형통한 자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그렇게 함으로 죄인된 인간을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게 하신 최대의 형통한 자 구원자인 것이다.
구원자 요셉
흉년이란 환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요셉은 야곱의 가족을 죽게 될 상황에서 구원한 자가 되었다. 그 과정은 형제들로부터 은 20에 팔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게되는 일은 가롯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은 30에 판 일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닮아 있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실패였고 예수님의 실패였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을 구원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자가 된다.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난다. 형들은 이제는 죽는구나 했을 때 요셉으로부터 놀라은 말을 듣는다. “당신들은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세기 45:5-7) 이러한 일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본 것이다. 요셉은 형들의 뉘우치는 말을 듣고 용서한 것이 아니라 형들을 이미 용서한 가운데 형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의 이러한 용서를 불안해 하다가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다시 요셉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구걸한다. 그러자 요셉을 울면서 이미 그것은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임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시고 인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간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부활하셨다. 이제부터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요셉만큼 예수님의 모형으로 닮아있는 자는 없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19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히브리어 메시아와 헬라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이다. 예수님은 앞의 세 가지 직분(삼중직)을 함께 가지고 계신 메시아(그리스도)였다. 예수님의 삼중직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제사장직의 모형으로, 모세는 예수님의 선지자직의 모형으로, 다윗은 예수님의 왕직의 모형으로 각기 등장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다. 창세기 14장에 한번 등장할 뿐이다. 그게 다다. 어떻게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 땅에는 국가가 없었고 부족들이 존재했는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속해있던 소돔과 고모라의 연합군과 엘람를 중심한 연합군이 싸워 패하자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아브라함이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옷을 구출해서 오던 중 살렘 왕이었던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들고 와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성경은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에서 제사장직은 아론의 집안에 주어졌다. 아론은 제사장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받은 첫 인물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아론이 아닌 멜기세덱을 예수님의 제사장직의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 5:10에서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율법과 성막제도를 하나님으로 받았다. 성막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길을 알려준다. 성막봉사는 레위지파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 속했다. 당연히 예수님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죄인사이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한 자였다. 범죄한 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짐승을 잡아 제사장에세 데려오면 제사장은 번제단에서 짐승을 제물로 드리고 죄가 용서되었음을 선언한 자였다. 그렇게 범죄한 자가 용서를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는 자가 제사장이었다. 예수님은 이 역할을 십자가의 죽을 통하여 감당하셨다. 제사장직을 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닌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을 따라 제사장직을 수행하신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선언하고 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히브리서 7:11,13-14)
히브리서 7:3에서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되심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닮아 있다.
살렘 왕 멜기세덱
창세기 14장은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도 살렘 왕이었겠지만, 히브리서는 명칭의 의미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두 단어의 합성어다.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다’이다. 그리고 ‘살렘’이란 ‘평화’다.
(1)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다. 성경에서 ‘의’란 ‘바른 관계’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죄에서 자유로운 자여야 한다. 물론 제사장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형식적으로는 제사장들만이 성소에서 봉사하는 특권이 주어졌고, 대제사장에게는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런 면에서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의의 왕이었다. 히브리서 4:15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온전한 의의 왕이시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다.
(2)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하는 근본적인 일은 죄인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주어진 이유다. 죄는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왜냐면 하나님은 공의롭기 때문이다. 공의라는 단어는 법정 용어다. 그래서 공의라는 단어에는 ‘반드시’라는 부사가 주어진다. 죄인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죄인을 ‘대신’하여 짐승으로 그 대가를 치루게 함으로 사람 자체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 성막제도이다. 짐승이 대신하여 죽은 사건은 성막제도가 주어지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이 경험했다. 바로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들인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숫양이 제물로 죽게 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게 될 메시아를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과 연관된 것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의도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인간을 대신하여 짐승이 죽음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평화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제사장이다. 짐승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의 차이는 짐승의 죽음은 되풀이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음 단 한번으로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6:20)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구속 또는 대속의 흐름
성경의 구원사는 구속 또는 대속의 역사로 일컬어진다. 대속이란 대신하여 속했다라는 의미다. 대속의 개념은 성경에만 주어진 구원개념이다. 물론 세상에서도 제물을 바치는 제사문화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문화와 성경의 제사문화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룬다. 세상의 제사문화는 신의 노여움을 풀어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취한다는 계념이라면, 성경의 제사문화는 죄를 속하여 하나님을 만난다는 개념이다. 죄를 속하는 방법은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다. 짐승이 대신하여 죽음으로 인간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대속의 길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인간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대속의 길을 언약하셨고 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게 된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길은 내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무임승차다.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시는 비싼 값을 치루셨지만 우리는 거저 주어진 선물인 것이다.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은 창세기 14이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은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의와 평화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등장하는 멜기세덱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 이는 대속의 역사에 있어서 핵심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만이 구원이 주어진다. 이렇게 예수님은 멜기세덱 반차를 따라 죄없는 자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해의 문을 연 제사장 직분을 행하셨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0
모세와 같은 선지자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곧 구약의 시대와 예수님이 오신 후 신약의 시대를 대비하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모세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은혜, 모세의 시내산과 예수의 갈보리산으로 대비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예수님은 모세와 닮아 있다. 제사장직에 있어서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닮아 있다면, 선지자직에 있어서는 모세와 닮아 있다. 사도행전 3:22-23을 보자.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이 구절은 베드로가 신명기 18:15이후를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선지자란 예언자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 예언의 ‘예’란 ‘미리 예(豫)’가 아니라 ‘맡길 예(預)’다. 선지자란 미래를 미리 보는 자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대언자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지자의 의미를 예수님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나 행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요한복음 12:50) 그러면서 예수님은 다른 선지자와의 차별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한복음 7:28-29). 모세 역시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민수기 12:6-8에서 하나님이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는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하여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 그리고 지금 행하신 일 그리고 앞으로 행하신 일을 말씀하시고 기록하게 하셨다. 모세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일이 된다.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대면하던 날 출애굽기 3:8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실 일을 말씀하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 데려가려 하노라.”
(1)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셨다. 이 과정은 십계명을 선포하시기 전에 서두로 먼저 이렇게 밝히시고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일은 그들을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내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먼저 이야기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를 창세기를 통하여 먼저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된 삶에서 해방시키려 하고 있다. 그 일은 모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일은 모세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일과 닮아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죄의 종이 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역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다.
(2) 하나님의 두 번째 일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 머무르게 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다. 그리고 그 이후 이스라엘의 삶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좌우된다. 율법이 이스라엘 삶의 이정표가 된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명기 18:19-20) 그러나 이러한 율법은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며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강조점이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은 인식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는다. 훈련의 마지막은 불뱀사건이었다. 가나안 정복의 길이 우회하는 경로로 이루어지자 이스라엘은 불평을 하게 되고 불뱀에게 물려 죽게되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놋뱀을 장대에 달고 산위에 서고 이를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한다. “쳐다본즉 살더라”(민수기 21:9)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3:24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
(3)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은 모세가 아닌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다. 이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야기 될 것이다.
율법과 은혜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모세의 율법을 종교화한 것이다. 그렇게 율법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율법을 통한 행위 구원을 말씀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구원으로 하나님 신앙을 일반 종교로 변질 시켰다. 종교화된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 아래 저주로 구약을 끝맺음 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6)
이미 말했듯이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끊임없이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내는 백성을 보며 하나님이 모세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끊임없이 불평하며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시며, 그래서 그들이 율법을 범한 길에서 돌아올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 율법의 절정이다. 그것은 바로 성막제도를 통한 용서의 법이다. 다른 어떠한 법은 어기더라도 용서받을 길이 이미 주어졌다. 그러나 성막의 법을 어기면 거기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이것이 모세에게 주어진 말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주어진 심판의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주어진 법을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선언했다. 이는 참으로 교만한 인간의 선언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해야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은 문자 그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님이 주게 된 동기 곧 사랑에 의해 완성됨을 마태복음 5장에서 밝히고 있다. 모세 율법의 핵심은 성막의 법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다. 레위기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레위기 법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이런 면에서 모세 율법의 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혜의 길이다. 모세 율법의 길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다를 바 없는 은혜의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모세 율법의 절정인 성막 곧 레위기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이라고 히브리서는 선포하고 있다. 성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선언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6:29)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6:40)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예수님은 모세를 통한 율법이 결국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너희가 성굥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모세는 영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성막의 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었다. 예수님은 이를 성취시키기 위해 오셨다.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첫 말씀은 이를 증거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저희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 성막에서 용서의 길이 주어졌듯이 영원한 용서와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자에게는 심판이 주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확한 뜻 구원의 길을 인간에게 전달하신 선지자였다. 이런 면에서 모세는 예수님의 선자자직의 모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