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6) 십자가로 향한 길
십자가로 향하는 길(27:32-44)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골고다 즉 해골이란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맞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32-36, 막15:21-32, 눅23:26-43, 요19:17-27 참고.)
예수는 조롱을 당하신 후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끌려 가셨다. 이때 예수님은 육체적인 기력이 모두 소진되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때마침 구레네 사람 시몬이란 자가 군중 틈에 있는 것을 발견, 그에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해서 골고다까지 가게 했다.
‘억지로 진 십자가’ 제수 없어 걸려든(징발된) 구레네 시몬은 이것이 재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였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해안 성읍으로 지금의 리비아 지역이라 한다. 이를 두고 주석가들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축복의 기회였다고 말한 것은 시몬에게는 알렉산더와 루포 두 아들들이 있었는데,(막26:31-32)
이들이 신약교회에서 상당한 활동을 했던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고, 특히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 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롭16:13) 했던 루포와 마가복음서에 기록된 시몬의 아들 루포와 동일 인물이란 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으나 그 일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기회가 된 가문이었다면 진정 시제말로 ‘가문의 영광’이 된 것은 분명한 것 아닌가 한다. 억지로 진 십자가 일지라도 예수의 길에 쓰임 받았다는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21세기 History의 주역이 될 것이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맞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쓸개 탄 포도주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형수들에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시게 하는 일종의 마취제라 한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시지 않은 것이다.
골고다는 해골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언덕이 해골 모양으로 되었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었을 것이라 하기도 하고, 사형 집행 터였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그리고 이곳을 갈보리언덕이라고 불리어 지기도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의 음역이라고 한다.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 패를 붙였더라.’(37-44) 이것도 대제사장들은 못마땅해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 써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 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요19:21), 하지만 사실 유대인의 왕이라 쓴 것은 단지 유대민족의 왕이란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당시로써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대인이란 범위 내에서만 생각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리 했을 찌라도 이방인의 복음이 된 지금의 왕의 의미는 우주적 통치자로서의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38-41)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 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 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 하더라’(42-44)
여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해 희롱하고 모욕하는 무리들은 무었을 보고 그리 한 걸까? 대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스스로 성경박사들이요 그래서 백성을 지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선지자들이 말한 예언의 말씀들을 읽지 않한 것인가? 아니면 읽었어도 기억을 못한 것인가?
왜냐하면 예수의 이 사건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 해 놓은 말씀들이었고, 더욱이 이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무식한 행동을 한 것은 겉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무식한 행동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심도, 출애굽의 사건도, 율법을 주심도, 제사장을 세우심도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온 하나님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일을 맡은 자들의 사고(思考)는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인간사고(人間思考)에 의한 가시적(可視的) 판단에서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해 무식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은 ‘영(靈)이란 사실부터 이해를 하고 제사장이 되던, 신부가 되던, 목사가 되던 해야 하지만 이들은 처음부터 육으로 부터시작해서 육의 생각과 지식, 육적가치와 판단, 육적 욕구를 위해 사는 자들이 되어 버린 자들이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자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남은 구원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이 얼마나 기막힌 조롱인가? 이들이 이렇게 조롱한 것이 영적판단에서가 아니라 육적(가시적)판단에서 이리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당장 내려와 보라하지만 조금만 더, 3일만 더 기다려 보라! 이분은 당당하게 변화된 부활의 몸으로 너희 앞에 나타날 터이니.....
이게 예수님이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3일 후에 부활의 몸을 보여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조금 기다렸다가 부활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 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5-7)
이 말씀을 많은 이들이 교리로 이해를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성령으로 난 자는 당연히 가치의식이 바뀌어 지는 법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에서부터 산상수훈과 지금까지의 사역의 중심이 육체의 병 고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담고 있는 영혼에 초점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정치적 메시아로 오심이 아니라 진정한 영의 세계의 메시아로 오신분이다. 지금 판단하고 지금당신이 사역하고, 추구하는 것과 비교해서 판단해보라, 천국은 육으로는 상속 받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아직도 겉으로 망하는 모습을 두고는 하나님이 저주한 거라 생각하고, 물량적 풍성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열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도 세속적인 것에 적용하고, 세속적 명예나, 사람들로부터 환영이나 박수 받는 일에 민감한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은 옛날에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은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십자가 밑의 사람들은 될 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리로 알고, 전통으로 아는 것뿐일 것이다. 내가 그분의 몸이요 그분이 내 몸이 된 분들은 가치도, 표현하는 삶도 달라질 수밖에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