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6/17) 하늘의 보좌

by wgma posted May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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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6

이리로 올라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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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시록 1:19에 보면 계시자는 사도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명한다. 사도 요한이 본 것1:13-16에서 본 인자의 환상이다. “지금 있는 일2-3장에 등장하는 7 교회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장차 될 일4장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이다.

장차 될 일의 첫 번째 광경을 보면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사도 요한에게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처음 들었던 장면이 1:10에 나오는데 이는 인자 곧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가 이리로 곧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올라오라고 하신다. 사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의 보좌를 보게 된다.

 

하늘의 열린 문

 

성경에는 세 가지 하늘이 등장한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하늘 곧 구름이 떠 있는 눈에 보이는 하늘이고, 두 번째 하늘은 우주 공간을 말하며,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4장에서 하늘이란 세 번째 하늘을 말한다. 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장소이다.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다.

성경에서는 때론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라고 하고 때론 하늘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이라고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곧 하나님의 왕권에 강조를 두고 있다면,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뜻 또는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에 강조를 둔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장소 하늘이다. 이 하늘의 문이 열려있다.

열린 문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등장한다. 하늘로 가는 열린 문이다. 이 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바벨의 원래 뜻은 신의 문이다. 신에게 이르는 문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능력으로 신의 문에 이르고자 함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바로 신이 되고자 하는 사건이다. 결국 인간은 신에 이르는 문을 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언어의 혼란으로 바벨탑은 무너지고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바벨은 혼돈만을 가져온다. 하늘의 문은 오직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열어 줄 수 있다. 손님이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주인만이 문을 열고 닫을 권한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늘에 이르는 문을 여셨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의 문 이야기는 창세기 28장에도 나오는데,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하란으로 가는 도중 돌을 베개하고 자던 중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을 보았는데, 깨어나서 야곱은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다(창세기 28:17). 그리고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라는 구절도 있다(말라기 3:10)

 

이리로 올라오라

 

이리로 올라오라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두 증인 이야기가 나오는 11:12에도 나온다. 그리고 이리 오라는 말은 17:121:9에 나온다. 이 말들은 휴거와는 연관이 없다. 휴거란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에서 끌어 올려란 단어를 라틴어 성경이 'Rapiemur' 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rapture’ 라고 하고 한자어로 휴거 携擧라고 번역된 것이다. 영어 rapture의 원래 뜻은 황홀함이다. 데살로니가 4:17에 나오는 끌어 올려의 원래 의미는 빼앗다 또는 탈취하다는 의미다. 강제하는 의미가 이 단어에는 들어 있다. 강제로 구름 속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다시 살려서, 살아 있는 자는 살아 있는 대로 지상에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린다는 것이다. 이 때 땅에서는 지진 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광경을 마태복음 24:40-41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한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데려간다라는 말은 받아들인다또는 영접한다는 의미다. 요한복음 1:12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 곧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권세가 주어진다고 하고, 요한복음 14:3에서는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신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에 대하여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믿는 자가 예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불신자는 이 땅에 남겨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내어 쫓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이야기 되고 있는데, 결론으로 마태복음 25:46에서 악인 곧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의인 곧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영생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은 종결된다. 믿는 자는 받아들여져 영원한 생명에 거하고 믿지 않는 자는 내어 쫓겨 지옥에서 심히 통곡하게 될 것이다.

다시 요한계시록 4:1로 돌아가자.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하늘로 올라오라고 명하신다. 여기에서 올라오라는 것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끌어 올리다와는 전혀 상관없다. 다시 말하면 올라와서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보라는 것이지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실 때의 휴거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올라오라는 것이 휴거를 말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4번이나 등장하는 오라는 명령 어느 곳에서 휴거가 일어나는가?

요한계시록은 4장에서는 하늘에서 보여줄 환상이 있다는 것이고, 17장에서는 광야에서 보여주는 환상이고, 21장에서는 높은 산에서 보여주는 환상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다. 11장에서의 광경은 복음을 전하는 두 증인이 죽음을 당했으나 이 두 증인이 다시 사는 광경을 세상은 보게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물론 이 장면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다.

 

성령에 감동되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명에 따라 네 가지 장소에서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환상은 성령에 감동되어 보게 되는 것이다. ‘성령에 감동되다라는 번역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성령 안에서 in the Spirit’이다. 이를 한글 번역은 두 번은 성령에 감동되어’(1:10, 4:2) 두 번은 성령으로’(17:3, 21:10) 번역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도 요한의 개인적인 편견이나 논리가 들어있지 않다.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보고 듣고 기록할 뿐이다. 단지 기록할 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전달되도록 사도 요한이 선호하는 단어나 문장 형식 등은 허용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은 성경의 결론으로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읽고 듣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1:9을 따라서 분석하여 볼 수도 있고, “성령 안에서라는 구도에서 분석하여 볼 수도 있다. (1-3) 성령 안에서 인자의 환상 보고 7 교회에 관한 계시가 전대되고 (4-16) 성령 안에서 하늘로 이끌리어 하늘보좌의 광경으로 시작해서 인사건, 나팔사건, 이적사건, 대접사건 등의 환상을 본다. (17-20) 성령 안에서 광야로 이끌리어 하나님 심판의대상과 심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21-22) 성령 안에서 높은 산으로 이끌리어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과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광경을 본다.

말세에 필요해서 주신 말씀

만일 요한계시록 4장의 이리로 올라오라가 휴거에 대한 말씀이라면 하나님은 왜 4장 이후의 말씀도 주셨을까? 믿는 자는 다 휴거한다면 믿는 우리는 4장 이후는 읽거나 듣거나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4장 이후의 모든 말씀도 선포되어야 할 그래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기에 사도 요한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그래서 4장은 휴거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하늘에서 본 환상에 대한 이야기고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때로는 경고를 심판의 무서움을 그리고 말세에 주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보게 한다. 할렐루야!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7

하늘의 보좌

 

인간타락 후 주어진 역사의 흐름에 대해 창세기 3:15은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는 창세기 4장 가인의 후손과 창세기 5장 셋의 후손간의 투쟁으로, 구약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투쟁으로, 그리고 신약의 역사에서 교회와 세상의 투쟁으로 그려지고 있다. 요약하여 설명하면 하나님을 중심하는 문화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의 충돌이다. 곧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결이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나라와 인간나라가 투쟁하는 역사로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승리로 결말이 난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투쟁의 구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하나님나라와 인간나라의 투쟁, 여기에 요한계시록은 인간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눈을 사건들을 전개한다. 이러한 투쟁은 아군과 적군이라는 진지가 형성된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아군 곧 하나님나라의 군대를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통수권자를 심판주의 모습으로 1장에서 소개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군대를 형성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7교회로 분류하여 각 교회의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교회를 무장시킨다.

 

4-5장에서 하나님나라의 진지를 소개한다. 이것이 하늘 보좌의 광경이다. 인간나라의 모습은 12-13장에서 그들의 전략을 드러냄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확신을 보여주고 교회를 공격하는 적군의 전략을 분명히 알게 함으로 믿음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신다. 그렇다면 4-5장에서 보여주는 하늘보좌의 광경은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4장은 하늘보좌의 전체 그림을 보여주고, 5장은 세상을 심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두루마리의 인을 여는 통수권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보좌의 광경은 상징적인 것들로 보여준다. 보좌에 앉으신 자의 모습, 그 보좌에 둘러 선 24장로들,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 그리고 보좌 앞에 놓여진 유리바다와 보좌를 수호하는 모습으로 동서남북에 서 있는 네 생물. 여기까지가 4장의 그림이다. 5장에서는 사자면서도 어린 양의 모습을 가지신 통수권자가 등장하고 이러한 하늘보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피조물의 모습으로 그 웅장함을 그리고 있다. 이제 4장의 그림으로 들어가 보자.

 

하늘보좌에 앉으신 이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를 본다.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라고 했듯이 하늘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곳이다. 뜻은 보좌에서 나온다.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이다.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왕의 모습을 상징적인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를 같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어떠한 모양으로 비춰진다는 의미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 곧 창조주 하나님의 모양을 보석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가치성이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다. 이러한 가치를 마태복음 13장 하나님나라의 비유에 등장하는 보화와 진주에서 드러내고 있다. 이 비유에서 보화와 진주의 가치를 안 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보화와 진주를 산다. 물론 마태복음 13장에서의 보화와 진주가 비유에 등장하는 자의 모든 재산과 가치가 동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등가성의 문제 곧 가치가 같기에 상품교환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값으로 도저히 매길 수 없는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성의 문제다.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는데 이를 인간을 구속하시는 구원과 연관하여 그려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너무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벽옥 같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벽옥은 어떤 종류의 보석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 보석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 성의 전체적인 색깔과 연관이 있다. 성곽의 기초석 첫 번째가 또한 벽옥이다. 벽옥 외에 다른 보석들은 색깔이 분명하다. 그런데 벽옥에 관련해서는 어떤 것과 결부하여 나타난다. 벽옥을 수정과 맑은 유리와 결부하여 표현하고 있다. 곧 벽옥의 특징은 투명하고 맑다는 것이다.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구속자 하나님의 모습이 수정과 맑은 유리 같은 벽옥으로 그려진다. 투명하신 하나님의 모습,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간의 구원과 연관하여 일관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이 모습이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벽옥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룩이란 구별이란 의미를 가진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성경은 거룩이란 의미를 등장시킨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란 단어를 만난다. ‘창조라는 말은 무(없음)에서 유(있음)를 만드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쓰이는 단어지만, 창세기 1장에서 우리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창조라는 단어가 왜 4번만 등장하는가이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장에서 창조라는 단어가 쓰일 때마다 무엇인가와의 구별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구별에서 제일 먼저 밝히고 있는 것은 피조물과의 구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자 그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사실로부터 성경은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구별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거룩이란 단어를 쓴다. 그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죄로부터의 거룩함을 선언한다. 죄로부터 구별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신 분이라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를 먹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한 가장 근본적인을 죄를 범한 것이다. 그 죄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곧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아닌 인간이 보기에 좋은 삶을 살아간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죄를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 ? 하나님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홍보석 같고

 

보좌에 않으신 이 곧 창조주 하나님을 홍보석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색깔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빨간 색깔이다. 피의 색깔이다. 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색깔이다. ‘공의라는 용어는 재판정에서 사용되는 드러난다. 그것도 형사재판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재판을 공정하게 치루는 재판장의 모습이 공의로운 자의 모습이다. 재판장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피고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재판하지 않는다. 오직 법전에 근거하여 죄를 죄로서 다룬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는 철저하게 공의를 가지고 다루신다. 여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으로 판결된 인간의 문제가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죄인으로 공의롭게 판결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자리 곧 지옥이 인간의 거주지로 판결된 것이다.

녹보석 같다

 

녹보석의 색깔은 자연의 색깔인 녹색이다. 그런데 녹보석을 무지개와 연결시킨다. 노아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주어진 홍수 사건 후에 노아의 가족에게 언약의 징조로 보여준 것이 무지개다. 하나님 보시기에 생각하는 자가 악하다고 판결된 인간에게 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모든 생명체가 죽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만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방주 안에서의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홍수가 멈추고 구원받은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다. 이때 그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 무지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반드시 지옥의 판결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인간과의 화해를 원하신다. 곧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이는 은혜로 노아의 가족을 방주 안에서 구원하심과 같다. 노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 곧 자연을 대표한 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 자연의 색깔은 녹색이다. 그래서 녹보석은 하나님의 은혜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또는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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