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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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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충 심판 (1)

개발이란 명목으로 훼손되어지는 자연환경의 파괴, 몰래 강물에 버려지는 공장의 폐수들, 멈추어지지 않는 과학의 발달로 오염되는 하늘, 결국 돈을 주고 사먹게 되는 식수 그리고 산소, 피부병의 번성, 이러한 자연환경 파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심이 자아내는 모습이다. 요한계시록 8장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자연환경 파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를 성경은 나팔사건으로 규정한다. 나팔은 경고의 의미다. 인간 욕심에 대한 경고다. 그리고 5번째 나팔을 분다. 무저갱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오고 그 사이로 황충 곧 메뚜기 떼가 올라온다. 그리고 인간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괴로움을 당한다.

 

끝이 없는 웅덩이로 부터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2]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나팔사건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에 대한 경고다. 5번째 나팔사건은 인간의 욕심 자체를 다룬다. 더 나아가 욕심으로 자연환경의 파괴를 주도하는 집단의 머리를 다룬다. 요한계시록에서 5란 숫자를 동양에서는 황극(皇極)의 수로 통한다. 곧 다스림의 수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땅을 훼손시켜서라도 인간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고 한다. 결국 그 대가를 인간이 받는다.

 

(1) 하늘에서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진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온 천하를 꾀는 큰 용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어 쫓긴다. 이 큰 용은 마귀 또는 사탄인데,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옛 뱀이라고 한다.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 열쇠란 문을 여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사단이 무저갱의 문을 연 것이다. 무정갱을 풀어 설명하면 끝을 모르는 웅덩이란 의미다. 이는 욕심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다. 욕심을 끝을 알 수 없다. 사탄이란 의미는 대항자이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됨에 도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주인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세상의 주인됨을 자각하라고 교육받고 그렇게 자란다.

 

(2) 주인됨이란 자신이 보기에 좋도록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세상을 창조하신다. 타락의 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인됨의 권리(주권)에 도전한다. 그리고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보시기에인간이 보기에의 갈등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나라와 인간나라의 투쟁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이끌어가는 주제이다. 성경에서 욕심이란 내가 보기에 좋은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은 이렇게 인간들이 보기 좋은대로 행하라는 끝없는 웅덩이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웅덩이에서 허우적된다.

 

(3) 사탄은 욕심이란 문을 열었다. 거기로부터 화덕의 연기같은 연기가 올라온다. 연기는 앞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곧 이어 해와 공기가 어두어진다. 해는 길을 바로 찾아가도록 하는 빛을 발한다. 그리고 공기는 사람으로 숨을 쉬게 함으로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그런데 빛이 가리워지고 삶의 숨이 막힌다. 욕심은 그렇게 길을 헤매게 하고 삶의 생명을 앗아간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욕심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결국 자신을 죽이는 길로 들어가게 한다.

(4) 어둠의 세계가 말하고 함은 무엇인가? 바로 혼돈의 세계다. 혼란이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의 결국은 혼돈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 서로의 뜻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였다. 결국 바벨탑은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 각자의 욕심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다 보지 못하게 한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옳은 것이라고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세의 때가 종말을 향하여 갈 때 인간은 엄청난 배움을 가지게 되겠지만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게 된다. 계급이 무너지고 국가 정체의 마지막인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면서 인간은 각자의 진리를 고집함으로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보편의 진리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어둠의 세계에서 세상은 방황하게 된다.

 

황충이 올라오다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4]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타락한 인간 세상은 인간들 스스로 보기에 좋도록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진화란 이름으로, 그리고 과학이란 이름으로 인간은 스스로 발전하여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발전은 인간 삶의 편리함과 동시에 수고로운 삶을 더 배가 시켜왔다. 컴퓨터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얼마나 편리하게 하는가? 그런데 그 이면에는 이로 인해 벌어지는 엄청난 범죄와 악을 춤추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동성애는 동성애를 거부할 자유조차 빼앗아 가버리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인권이 죽어가고 있다.

(1) 이러한 현실을 황충의 등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황충을 결국 불러들인다. 황충이란 메뚜기 떼들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 내린 10 재앙 중 하나가 메뚜기 떼의 재앙이다. 수확한 모든 작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인간 수고의 대가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황충의 등장은 계산되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밀어 닫힌다. 쓰나미의 밀어옴, 원전의 사고 등등 인간의 수고함을 얼마나 헛되이 만들어 버리는가? 세계 국가는 원전을 계속 보존해야 하는가 아니면 폐지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혼돈을 거듭하고 있다. 단순히 지구 온난화로 인해서만 물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니다. 호수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인간들의 욕심으로 막아 버림으로 점차 사막화되어가는 현실은 어찌 할 것인가? 욕심의 특징은 갑자기 올라오는 황충의 습격을 받을 때까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2) 다시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주권은 하나님이보시기에로 표현된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을 다룬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 곧 인생의 주인이 되라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에 대해 여자가 본즉이란 문장이 핵심을 이룬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주어다. 이는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주인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성경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세상은 언제나 내가 누구인가?”로 묻는다. 그리고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회의에 빠진다. 왜 인간은 혼돈에 빠지는가?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땅을 바로 다스리는 자리다.

 

(3) 여기에 황충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환난은 받게 되겠지만 개개인의 욕심으로 받게 되는 황충의 습격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왜냐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기에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 보기에를 따라가다가 황충의 습격을 당한다. 인류의 타락한 역사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포기해 왔다.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 규범을 세워가기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여 왔다. 언제나 정의는 힘 있는 자의 것이었고 도덕의 가치는 있는 자들의 편에서 세워져 왔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는 힘을 잃고 지금은 곧 파괴하는 문화가 되었다. 오직 각자의 가치만 소중해 지고 선악의 개념은 철저하게 개인화 되었다. 오늘날의 세계는 무엇이 옳은 가를 묻지 않는다. 나의 이익,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이익, 그리고 내 나라의 이익만이 중요한 세대가 되었다. 내게 이익되는 것이 내게 있어서 가치 있는 것이 되었고 선이 되었다. 문제는 교회도 이러한 세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바른 믿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의 삶을 따라간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물질과 인간관계 그리고 악을 바로 다스린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다. 욕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죄를 만들어 낸다. 나팔 사건, 그것은 내가 보기에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 욕심에 대한 경고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6

황충 심판 (2)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파괴, 그로 인한 황충의 공격, 끝없는 웅덩이(무저갱)의 특징을 가진 욕심은 인간의 생각을 마비시킨다. 왜냐면 욕심은 언제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에 이웃을 돌아 볼 여유가 없다. 특별히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욕심은 돈과 연관되어 세상이 돌아가기에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기업, 나라와 나라사이의 분쟁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욕심은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진리를 왜곡시키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악으로 이끌어간다. 그렇게 욕심의 대가는 황충 또는 메뚜기의 공격으로 순식간에 황폐해 지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그 황폐함으로 오는 고통은 마치 전갈에 쏘인 것 같은 고통이다.

 

죽기를 구하여도

[9: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6]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메뚜기도 한 철이란 말이 있다. 실제로 메뚜기의 활동기간이 길면 6개월 짧으면 2개월이다. 여기에서는 다섯 달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메뚜기의 활동기간을 뜻하는 5란 숫자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숫자의 의미를 가진다. 4란 수가 자연 또는 땅을 상징하는 수라면, 5는 땅을 통제하는 다스림의 수이다. 메뚜기 떼의 공격은 어떤 다스림의 지혜도 지식도 통제도 통하지 많다. 그저 메뚜기의 공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통제도 불가능한 메뚜기 떼의 공격, 이러한 고통의 순간을 전갈의 독침을 받았을 때로 비유하고 있다. 그 고통은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다.

죽음도 피해가는 고통의 순간들. 한마디로 경고다. 나팔사건은 인간의 욕심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나팔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고 인간 각자가 보기에 좋도록 살아가는 삶을 선으로 포장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경고음은 언제나 살 기회가 있음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던 인간선언, 그 인간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인간 세상에 대한 모습은 미혹과 전쟁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과 죽음이다. 이를 나팔사건은 인간 욕심에 대한 경고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스스로 땅을 바로 다스릴 수 있다고 인간은 선언했지만 결국 땅 또는 자연이 훼손되는 모습을 나팔사건은 그려내고 있다. 땅과 바다 그리고 강과 하늘이 파괴된다. 자연이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훼손당한다. 그리고 그 대가를 인간 스스로가 당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어도 인간 스스로도 주어진 환경(땅 또는 자연)를 잘 다스리며 유토피아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정치와 교육 그리고 과학 등으로 수고하였지만 결국 현재 세상은 함께 잘 사는 유토피아를 포기했다. 그리고 각자도생 곧 각자 스스로만 잘 살면 되는 삶을 선언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한 인간욕심의 결과라고 이야기 한다. 이를 사사기 21:25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개인은 개인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작자 자기의 욕심에 따라 행한 결과를 나팔사건은 이야기하며 욕심이 가져오는 결과물이 바로 황충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은 인간 욕심이 결코 다스릴 수 없는 세 영역에 대해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물질과 인간관계 그리고 악이다. 인간은 더 이상 돈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돈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관계가 되었고 그 결과 악이 성행하게 된다. 고통이다. 어두움에 진리는 감추어지고 거짓이 진리인양 양의 탈을 쓰고 인간세상을 덮어 버린다.

파괴 - 황충들의 모양

[9: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무저갱, 끝이 없는 웅덩이의 사자의 이름이 밝혀진다. 인간으로 하여금 무저갱의 욕심을 갖게 한 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파괴()”. 히브리어로 아바돈헬라어로 아볼루온이다. 이는 파괴자를 의미한다. 성경은 이 파괴자를 마귀로 통칭한다. 마귀는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마귀를 또한 사탄이라고도 한다. 사탄이란 대항자이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란 의미다. 그렇게 사탄과 마귀는 동일인이 된다. 하나님께 대항하게 함으로 인간을 결국 파괴시키는 그가 사탄이요 마귀다.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스스로 보기에 좋도록 행하라는 욕심으로 이끌어 결국 인간 스스로 자신을 피괴하도록 한다. 인간은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다. 그래서 욕심은 그 자체로 파괴와 동일시된다. 요한계시록 9장에 등장하는 황충의 모양은 곧 욕심의 모양과 동일시된다.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스스로 내가 주인이요 왕이라고 외친다(머리). 이것이 욕심의 의미다. 주인의 특권이란 자기가 보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의 시각으로 본다. 그런데 그 시각은 무척 지혜로워 보인다(사람의 얼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기에 욕심대로 행한다. 물론 너무 자주 이를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함이라는 구실을 붙인다. 결국 각자들의 욕심은 분쟁을 일으킨다. 욕심대로 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쟁을 준지하는 것이다. 모든 자가 다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다. 각자 모두가 왕이다. 여기에 분쟁이 있고, 나라끼리의 분쟁은 전쟁이 된다.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은 이를 고민해 왔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사건, 서로 흩어짐을 면하자고 건설하기 시작한 바벨탑이었으나 결국 그들은 언어(생각)의 다름으로 인해 흩어지고 만다. 그렇게 욕심은 혼란만을 야기 시킨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한 인간세상에 대한 가장 지혜로운 답은 관계 단절이다. 관계로 이루어진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오직 혼자만의 세상 구축은 를 깨닫는다는 말로 합리화 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사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인간의 삶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보니 욕심과 욕심이 부딪치는 세상으로 인해 욕심은 언제나 전쟁을 준비하는 말과 같다. 그리고 욕심의 끝자락에는 황충의 파괴가 기다리고 있다.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욕심은 언제나 본인 자신에게 있어서는 매력이 있다(여자의 머리털). 욕심은 언제나 이익을 선택한다. 포장지는 자신이 갖는 욕심은 다른 자들에게도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위안을 포함한다. 그래서 남을 위한 나의 희생이라는 곁 포장지로 자신을 합리화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포장지를 걷어내 버린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포장지를 들어내고 그들 속에 가지고 있는 욕심을 사람들에게 들어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이렇게 욕심은 내면에 사자의 이빨을 품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것에 대한 이빨이다. 결국 자신들의 욕심이 밝혀지자 그들은 사자의 이빨을 드려냈다. 이런 면에서 일반 군중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따라 행하지 않자 그들 역시 십자가 형벌을 내리라고 빌라도에게 소리쳤다. 욕심은 자신에게는 매력이지만 남에게 대해서는 사자의 이빨을 품고 있다. 결국 황충의 모양을 욕심자체가 품고 있다.

 

[9: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욕심은 가슴에 철판을 깐다(철 호심경). 욕심이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의 권력자의 문제로 넘어가면 그 철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된다. 욕심은 대중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논리의 무장, 그리고 자신의 논리에 대항하는 자에게는 전쟁도 불사하며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욕심을 이룬다.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결론이다. 욕심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있지 남을 향해 있지 않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을 선동한다. 개인으로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한다. 그리고 황충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는다. 관계가 파괴되고 자신이나 남을 동시에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욕심은 언제나 황충을 품에 안고 다닌다. 그래서 아바돈이 되고 아볼루온이 된다. 욕심의 결과는 언제나 파괴다. 그래서 성경은 나팔사건을 통해 인간의 욕심을 경고하고 있다. 내 자신이 보기에 좋도록 살 것 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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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7

전쟁

인간 욕심에 대한 경고의 나팔, 인간 욕심으로 인해 땅 또는 자연은 훼손되어 간다. 욕심은 언제나 진리 또는 참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는 어둠을 가져온다. 그리고 혼란이다. 이는 첫 번째 화로서 황충의 심판이다. 그리고 국가의 욕심이 일으키는 재앙이 밀려온다. 두 번째 화이다.

인간은 전쟁을 통해 지옥을 본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에서 전쟁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강대국은 전쟁 무기를 만들어 낸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익을 낼 수 없다. 욕심은 언제나 돈과 연관된다. 기업의 욕심은 자연을 훼손시키고, 국가의 욕심은 전쟁을 일으킨다. 여섯 번째 나팔의 경고는 국가 간의 전쟁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초토화 시킨다. 결과는 비극이다. 전쟁은 그야말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도록 만든다. 죽음의 공포가 지금 여기에서 보게 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지옥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역사가 만들어 내는 최대의 비극, 그것이 전쟁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나팔의 경고를 하고 있다.

 

징계로서의 전쟁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14]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범죄할 때 하나님은 이웃 나라들을 통하여 징계하여 왔다.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고난을 당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깨 부르짖는다. 기도가 응답된다. 큰 강 유브라데를 건너 군대가 몰려온다. 예레미야 46:10을 보자.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 남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멸망당하는 광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제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 유다의 멸망을 예수님이 오시고 복음이 세상에 선포된 이후, 유브라데를 통해 남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해 달려오는 바벨론의 군대 그리고 전쟁의 그림을 인간 세상에 연장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여섯 번째 나팔의 경고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것과는 달랐다. 유다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마침내 국가의 재건이 아니라 무너진 성전의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에 돌아온다.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성전의 재건이다. 이렇게 전쟁의 참화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여섯 번째 나팔 사건의 핵심이다. 이스라엘을 침략해 오는 전쟁의 소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의 소리였다. 이와같이 예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이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소리는 인간의 욕심에 대한 하나님 징계의 소리이다.

 

죽음의 공포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16]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을 받고 정한 때에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한 전쟁이 일어난다. 착각하면 안된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의 욕심이 일으킨 참화다. 하나님이 일으킨 것으로 오해하지 말자.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인간 타락 이후, 하나님은 인간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감을 지켜보기로 하신다. 그 결과 땅은 훼손되고 진리는 어둠에 갇히고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는 전쟁의 참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다니엘서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개입하시고 주관하시는 역사를 선포하고 있다.

구원은 결코 인간이 이루지 못한다. 이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구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선언이다. 인류 구원을 하나님의 개입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국가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전쟁의 참화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물론 세상은 이를 깨닫지 못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쟁의 참화를 통해 하나님 진노의 소리를 듣는다.

세계 12차 전쟁을 통해 세계는 변혁이 일어났다. 그렇게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욕심을 따라 역가가 재편되지 않았다. 생각지 못했던 역사의 변천을 보아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이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국가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국을 통해 인간구원의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세상에 선포되도록 하여 왔다. 이를 통해 한국은 복음을 세계에 선포하는 국가가 된다. 공산주의 국가와의 대결에서 미국을 중심한 자본주의 국가의 승리, 이제는 이슬람 지역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다. 전쟁의 흐름을 쫓아가 보라. 이는 단순한 전쟁이 아니다. 국가의 욕심이 일으킨 전쟁이지만 결론이 예단된 전쟁의 흐름을 보면, 복음 선포의 흐름이 그곳에 있음을 본다. 분명 국가의 욕심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이는 전쟁이다고 결론내리게 된다.

당연히 보여지는 현상의 전쟁 모습은 삼분의 일이 죽음을 당하는 공포가 있는 예견된 전쟁이다. 언제 그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가 이미 예견되어 있다고 선언한다. 6번째 나팔 사건은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전쟁이 몰고오는 죽음의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제나도 죽게 되는 상황이 전쟁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는? 나팔 사건이 계속 이야기 하고 있는 삼분의 일의 죽음이다. 그 삼분의 일 속에 내가 들어 갈 수 있다는 공포가 가장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여섯 번째 나팔 사건 전쟁이다.

마병대 이만만의 군대를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보병의 수가 아니다. 말을 타고 몰려오는 군대의 수다. 유럽은 말을 타고 몰려오는 징키스칸의 몽고족들 공격에 죽음의 공포를 이미 겪은 바가 있다. 2라는 수는 집을 견고하게 세우는 두 기둥을 말한다. 견고함이다. 천천이나 만만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대를 통해 외치는 소리다. 그 소리는 결국 왕에게 주어진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에게 붙여진 소리가 만만세다. 이만만 곧 이억의 수는 달려오는 마병대의 군대를 보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자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공포의 외침이다. 아예 맞붙어 전쟁을 해 볼 염두도 나지 않는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군대 그것도 당시 최고로 무장된 말을 탄 군대를 보고 있다. 이제 이 나라 망했네. 이제 나도 죽었네 하는 곡성이 울리는 그림이 그려지는 광경이다. 그래도 살아날 수도 있겠지만 죽어야 하는 삼분의 일 속에 나도 있을 것이란 죽음의 공포, 6번째 나팔 사건의 공포다.

 

그래도 삼분의 이는?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18]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19]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상대할 수 없는 군대가 다가온다. 그들의 가슴은 칼도 창도 뚫을 수 없어 보이고 사자처럼 달려드는 군대에 혼비백산한다.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온다. 이는 사도 요한이 현대의 전쟁 무기를 환상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불이 나면 모든 자가 불에 태워서만 죽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 숨이 막혀서 죽기도 하고 유황의 냄새에 질식해 죽기고 한다. 결국 죽을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을 자는 죽음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머리를 피해서 이제는 살았는가 싶더니 말의 꼬리가 냅다 친다. 결국 죽는다는 이야기다. 죽을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나팔 사건은 삼분의 이는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죽을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럼 그러한 죽음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경고다. 죽음에서 살아남았다고 자만하는 자에게 3번째 화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대접 사건이다. 이때는 모두 다 죽는다.

인간이 타락하자 인간의 수고 그 대가가 죽음으로 선언된다.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피할 자는 없다. 의학의 발달로 생명이 연장되었을 뿐이다. 오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고통인 자도 있다. 편하게 죽든 고통가운데 죽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문제는 죽음 이후다. 천국인가, 지옥인가? 전쟁은 지옥이다. 전쟁을 겪은 자는 안다. 그 지옥의 모습을. 그래서 성경은 살아 숨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말씀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서 보게 된 지옥의 현실을 죽음 이후에도 겪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의 경고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8

우레 소리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하나님의 심판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정리하고 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창조자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어떤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심판을 주제로 성경을 결론으로 정리해 주는 기가 막힌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지금도 계속되는가 하는 논란은 뜨거운 논쟁거리다. 이런 논란에 답을 해 주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0장에 등장하는 일곱 우레 소리다. 이 우레 소리는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지는 자연환경과 그로 인한 혼란 그리고 곳곳에 일어나는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경고의 나팔 사건 후 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가운데 주어진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성겨에서 말하는 욕심이란 내가 보기에 좋도록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의 권리를 설명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 세상은 내가인간이로 포장하여 자신이 가진 욕심을 인간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합리화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인간 전체를 위한 것은 없다. 인간 모두를 위한 듯 하지만 결국 자기 개인 또는 어느 특정 기관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아마 인류 모두를 위한 최고의 정체가 바로 공산주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철저한 계급적 투쟁노선을 걸었고 마침내 철저하게 실패한 정치체제가 되었다. 차별 없는 사랑을 위하여 동성애가 어느 국가에서는 합법화되고 또 어느 국가에서는 합법화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동성애 합법화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동성애를 반대하는 표현자유의 길은 차별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역차별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모든 종교는 자유롭게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소리는 관대한 인간의 소리인 것 같지만 복음이 광장에서 선포되고 학교에서 기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하도록 결론짓게 되는 것은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졌다는 미국에서의 일이다. 이는 특정 그룹의 인권을 존중해 주기 위해 또 다른 인권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 또한 어떤 그룹이 보기에 좋도록 행해진 악의 모습이다. 어떤 모습이든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거절하고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행해지는 타락한 인간 사회는 개인 또는 어느 집단의 욕심으로 인해 인간 세상은 혼돈을 겪고 있고 더 심화될 것이다. 미국은 인권으로 인해 망할 것이란 소리가 그냥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인간의 욕심에 대한 경고의 나팔, 혼란이 일어나고 지옥 같은 비극을 보는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인간은 결코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나팔사건의 결론이다. 오히려 더욱 세상은 우상화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 가장 큰 우상은 돈이다. 돈은 이미 권력이 되었고, 전쟁은 언제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고 인간은 욕심으로 야기된 죄의 문제를 심각히 들여다보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인과 간음 도둑질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죄악 가운데에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앙을 막기 이한 복술이 성행할 것임도 예견하고 있다. 악을 악으로 덮는 세상이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악의 세상을 목격하고 있다.

 

교회의 사명

[10:1]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회개치 않는 세상,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주어진다. 타락한 인간들은 복음을 듣지 않고는 결코 회개치 않는다. 결코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한 이유는 자신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기 때문이고 이는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인간들에게 주었다. 요한계시록 10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펴 놓인 (하나의) 작은 두루마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 발은 바다에 왼 발은 땅에 밝고 있다고 함으로 전 세계에 선포되어야 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계시란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가장 핵심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성경이 로마서 10:9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복음을 들려주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회개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로마서 10:14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하면서 17에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에서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며, 마태복음 24:14에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 전파에 있다.

 

일곱 우레 소리

[10:3]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4]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예언의 말씀이란 세상에 전달해야 할 말씀이란 의미다. 교회는 천국 복음 또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전달함으로 사람들이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복음의 말씀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으로 족하다. 더 이상 구원의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다는 것이다. 더 이상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끝나는 22장에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이르기까지 66권의 말씀 외에 더 하거나 제하면 저주가 있을 것을 엄격하게 말씀하고 있다.

물론 구원을 위해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환상이나 계시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모든 사람에게 공유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단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개인에게 주어진 것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들어야 하고 공유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모두가 공유해서 지켜야 하고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할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잘못된 사람이다.

요한계시록 10장은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들었던 일곱 우레 소리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성령에 이끌리어 환상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레는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도 요한이 들었던 일곱 우레 소리를 기록하려고 하니 이는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이는 사도 요한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이지 결코 모든 자가 공유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일곱 우레 소리를 들었다는 것조차 기록하지 말지 왜 이러한 사실은 기록했는가? 복음을 전할 때 교회가 주의해야 할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이 교회에 있음을 말씀하면서 주어진 말씀이 일곱 우레 소리다. 일곱 우레가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다. 아예 유추할 필요도 없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전달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주어진 환상이나 계시는 그 개인으로 끝내야 한다. 어떤 자는 천국과 지옥을 가 보았다고 전하는 자가 있다. 물론 간증의 차원에서 이야기는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으로 추가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오직 지금 주어진 66권의 성경으로 족하다. 개인이 받은 은혜가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할 은혜가 아니듯이 개인에게 주어진 계시가 모두가 공유해야 할 그래서 성경과 같이 취급될 것은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으로서 성경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오직 그 개인에게만 주어진 환상이나 계시는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오직 자신에게만 들려주었던 일곱 우레 소리는 그 내용조차 밝히지 않고 자신이 들었다로 끝냈다. 결국 일곱 우레 소리의 핵심은 복음을 전하는 데는 오직 66권 성경으로만 전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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