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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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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의 광경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리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펼쳐있는 하늘의 광경을 본다. 보좌를 중심으로 24 장로들과 7 영 그리고 4 생물이 포진되어 있다. 어린 양이 등장하고 많은 천사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둘러 서 있다.

 

24 장로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12란 숫자는 순환의 수다. 흥미롭게도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의 태어남을 12라는 숫자로 순환하여 자리 매김한다. 동양은 사람이 태어난 해를 12띠로 이야기 하고, 서양은 사람이 태어난 월을 따라 하늘의 궁도를 따라 이야기 한다. 그래서 동양은 12해를 주기로 같은 띠의 대표로 짐승을 내세우고, 서양은 12달을 주기로 하늘의 별자리를 대표로 내세운다. 이렇게 12라는 숫자는 어떤 그룹을 대표하는 숫자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회합이 있을 때 각 지파에서 한 사람을 대표로 하여 보냄으로 그 지파의 모두를 나타낸다. 이는 영어의 대표단수와 같은 의미다. 정치로 말한다면 어느 지역의 주민을 대표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주민의 대표자로 국회에 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지역의 국회의원의 의사가 그 지역 모든 주민의 의견을 대신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12 지파의 대표자인 12 장로는 결국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구약이 12지파의 장로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듯이 신약의 예수님이 부르신 12제자로 하여금 신약의 전 성도를 대표하게 한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면서 목자였고 또한 장로로 칭해졌다. 결론적으로 24 장로는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24 장로들은 각기 보좌에 앉아 있다. 보좌의 의미는 다스리는 자의 자리다. 요한계시록 20:6에 보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권 시대에 왕은 단순히 통치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역할도 함께 담당했다. 마태복음 19:28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심판의 개념은 곧 통치의 개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다스림의 모습은 창세기 1:26-28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24장로로 대표되는 하늘의 성도는 바로 창세기 1:26-28의 다스림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된 그래서 의인이 된 자로 흰옷을 입고 있으며,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그것도 변하지 않는 금 면류관을 쓰고 있다.

 

하나님의 일곱 영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7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모든 교회를 7 모습의 교회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하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다. 성령의 모습을 등불로 묘사하고 있다. 등불은 비추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 등불이 일곱이다. 이는 어느 영역이든지 비추이는 등불을 상징한다. 어떤 종류의 교회이든지 성도이든지 등불은 비춘다. 이와 같이 성령의 임함도 어떤 모습의 사람이든지 임한다. 이렇게 성령의 일은 모자람이 없다.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성령은 임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시면 성령은 임한다. 베드로는 요엘 2:28-29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사도행전 2:17-18)

성령의 모습은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구약의 성소 안에 보면 등불은 말씀을 상징하는 떡을 비추고 있다. 요한복음 16:13을 보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성령은 우리로 말씀으로 인도한다. 풀어 말하면 성령은 우리로 말씀을 바로 깨달아 알게 하신다. 어떻게? 고린도전서 2:10을 보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렇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슴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심정으로 성경을 보게 하신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지, 왜 죽으셔야 했는지, 왜 부활하셨는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졌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령 하나님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온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게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수정 같은 유리 바다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보좌 앞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8)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숨김없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느 것 하나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다. 왜 바다인가?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게 결코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강조하는 것은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에 대한 반복 용어를 쓴다. 수정과 유리다. 수정은 투명하다는 것의 강조라면, 유리는 훤히 드러나 보이는 것을 강조한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오직 흠 없는 자 투명한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간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역시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4 생물

[4:6]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4란 수는 영역의 수로 자연 또는 땅을 상징한다. 타락한 인간은 땅을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소망을 두고 땅에 종속되고 만다. 땅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인간이 타락하자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창세기 3:18). 이렇게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시켜가는 자연을 통하여 그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는 땅, 그 심판의 모습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은 4 생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자처럼 맹렬하고, 송아지처럼 우직하며, 사람처럼 지혜롭게 보이고 날아가는 독수리처럼 신속할 것이다.

4 생물은 앞뒤에 날개 안과 주위에 눈들로 가득하다. 인간에 대한 관찰자로 그려지고 있다. 자연은 정직하다. 자연은 용서가 없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의미다. 땅에서 전개되는 지진과 기근 그리고 전쟁,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 심판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한다. 되풀이 하여 말하지만 자연()은 하나님 심판의 도구가 된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어떻게 전재시켜나가는지 보게 될 것이다.

4 생물의 모습은 에스겔 1장에 등장한다면, 생물이 각기 6 날개를 가졌다는 것은 이사야 2장에 등장한다. 이를 이사야는 스랍이라고 했다. 이사야에서 말하는 스랍이 다른 곳에서는 그룹으로 칭하고 있다. 그룹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자로 기록되었고, 또한 성막의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의 뚜껑인 속죄소 위에 2 그룹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그룹은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을 가진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하여만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속죄소 위 그룹 사이에서 만날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죄를 속해주는 속죄소의 은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들의 죄가 사해졌기에 그룹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구원받는 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생물은 각기 6 날개를 가졌다. 둘은 얼굴을 가리고 둘은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난다. 이를 통해 감히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수 없는 우리의 모습과 더러움을 상징하는 발을 가리워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함을 말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자연 또는 땅은 창조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9

하늘의 노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와 인간나라와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의 선두에 서시는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1장에서 보여주고 2-3장에서 전투에 임할 교회를 무장시킨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나라의 진지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찬양받기에 합당하다. 4장에서 시작되는 하늘의 노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주어지는 성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이다. 요한계시록에 들려주는 찬양의 내용을 총괄하여 살펴보자.

 

하늘의 노래는 예배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찬양의 노래는 예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가지는 착각 중 하나는 하늘나라에 가면 24시간 찬양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노래함으로 그려지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모습은 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한글성경은 예배를 경배로 번역하고 있다. 경배 또는 예배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의 뜻은 무릎을 꿇다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란 단어도 무릎을 꿇다이다. 성경에서 이 등장할 때는 복의 내용이 아니라 복을 주는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복의 의미가 무릎을 꿇는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복을 주는 자에게 대하는 복을 받는 자의 태도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실제로 구원 받았다 함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와 함께 하는 삶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복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복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함의 풍성한 삶이 복으로 주어진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삶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자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는 태도가 예배이다. 요한계시록에 주어진 노래함의 모습은 삶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함의 모습을 성경의 결론으로서 그리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실제로 예배하는 자의 모습을 엎드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늘의 노래의 본질은 드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예배하는 자의 행위는 드림이다. 자시들의 받은 관을 살아계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드린다. 그렇게 요한계시록은 예배의 본질을 결론짓는다. 우리가 받은 재능과 물질 그리고 명예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이를 로마서 12:1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저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참 예배가 아니다. 진정한 예배의 본질은 나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신앙고백적 드림이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나의 것을 사용하시라는 결단적 드림이다.

 

하늘 노래의 내용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 대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예배한다. 곧 모든 것의 주인되심을 시인한 것이다. 그리고 살아계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예배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좌에 앉으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면을 부각시켜 예배하는가?

 

(1)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요한계시록 4장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왜 하나님은 예배받기에 합당하신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뜻하신 바대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고 예배한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찬양의 초점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결코 피조물과는 구별되신 분으로 그는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창조하신 후 그냥 지켜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렇게 하나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마지막이시며 그는 자신의 뜻대로 타락한 인간의 역사를 마치실 전능하신 자이시다고 성경의 결론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

(2) 둘째는 구원주 하나님을 예배한다. 대표적인 노래는 5장에 나온다. 여기에는 특별히 어린 양의 구속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을 피로 사셔 하나님에게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음을 찬양한다. 이러한 구원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새 노래라고 선언한다. 곧 새 노래란 구원에 관한 노래라는 의미다.

 

(3) 마지막 세 번째는 심판주 하나님이시다. 대표적인 노래는 11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왕이시다. 심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원하시는 심판이고, 또 하나는 멸하시는 심판이다.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을 멸하시는 자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타는 불못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보좌에 앉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창조주 되시며 구원주 되시고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에서의 노래는 이러한 세 양사의 하나님께 대한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노래들을 어떤 노래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어떤 노래는 구원주로서의 하나님을, 어떤 노래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하늘 노래의 결론

 

예배의 결론은 주기도문의 결론과 같은 양식을 가진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에서의 노래 결론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배하는 자들은 아멘한다.

 

(1) 영광에 대한 원어적 의미는 복잡하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할 때 성경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인간의 기쁨을 표현할 때 성경은 행복이란 표현을 쓴다. 그래서 어떤 일을 통하여 내가 또는 교회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할 때는 나를 통해 또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영광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할 때만 쓰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때에 하나님은 영광 곧 기뻐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또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졌을 때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창조된 세상을 보고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최대 기쁨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임을 누가복음 15장에서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또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2) 존귀란 용어의 의미는 가치. 영어의 예배에 해당하는 단어가 ‘worship’이다. 이 단어는 worth(가치)ship(자격)의 합성어이다. 단어 자체의 뜻으로 풀이하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음이다. 그래서 영어의 worship이란 가장 가치가 있는 유일한 분에게 드리는 찬사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이야 말로 모든 피조물에게 찬사를 받기에 오직 유일한 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구원주이시고 또한 심판주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찬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자이시다. 결국 존귀라는 용어는 찬사라는 단어로 결론지어진다.

 

(3) 권능이란 용어는 능력이란 뜻을 가진다. 당연히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심으로 표현된다. ‘창조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도() 있게 하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용어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또한 심판하실 것이다. 도저히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케 하셨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

 

요한계시록은 영광과 존귀 그리고 권능 외에도 여러 가지로 예배받기에 합당하시다고 노래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부 그리고 감사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나 영광과 존귀 그리고 권능은 모든 노래에서 찬양받기에 합당한 근본적인 것으로 등장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0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나라의 선두에서 심판권을 가지시고 지휘하시는 성자 하나님이 5장에 등장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다. 그리고 힘있는 천사가 이르기를 이 인을 누가 떼기에 합당한가고 묻는다.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마침내 인이 떼어지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묵시적으로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다니엘서다. 다니엘은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으로 시작하여 바사(페르시아) 그리고 헬라(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로만 가톨릭 그리고 열왕의 시대 곧 유럽세계가 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묵시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당연히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역사는 이스라엘과 연관된 나라들의 역사들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의 역사다. 성전에서 죄가 사해지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스라엘은 인류의 죄를 사해주는 참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구속의 역사로서의 이스라엘은 끝을 고한다. 이제 구속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로 바통을 넘긴다. 더 이상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단번에 한번 죽으심으로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길은 온전히 이루어졌다. 다시는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

피의 제사를 드렸던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영원히 파괴되었다. 성전 뜰에 있었던 번제단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전 뜰은 이제 이방인에게 내어주게 된다. 여전히 번제단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된다. 더 이상 제사예배는 없다.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다. 곧 축제다. 죄 사함의 기쁨과 구원의 풍성함을 가지고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다니엘 12:11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라고 예언한다. 교회의 역사는 여전히 제사예배를 붙잡고 있는 로만 가톨릭 시대를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로부터였다. 마침내 정치가 개인의 신앙에 개입할 수 없는 시대가 선언되었다.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는 신앙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다. 그렇게 세계는 정치가 신앙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복을 누리고 있다.

다니엘 시대는 정교일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는 왕정시대에는 계속해서 정교일치였다. 국가가 국민이 믿어야 할 종교를 정했던 시기였다. 열왕의 시대 유럽의 왕정시대는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피흘림이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마침내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켰다. 개개인의 권리가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다니엘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델레스가 비웃었던 민주주의 시대가 오게 되고 개개인의 권리가 중요시 되었다. 각 개인의 권리가 인권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리를 비웃는 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다. 곧 이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 시대가 된 것과 같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권리가 최고로 부딪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시대를 알리고 있다. 다니엘은 아직 왕정시대의 최고점에 있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결코 이러한 미래의 일이 알려질 수 없었다. 미래에 대한 일이 봉인되었다.

 

[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러나 봉해졌던 인이 열렸다. 이 일곱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니엘에게는 마지막 때까지 봉하라고 한 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린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들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 민주주의의 도래, 인권이 선언되는 시대, 인간 개개인의 욕심이 극대화 되는 시대, 다니엘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열린다. 일곱 인이 떼어지는 순간이다.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5: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하늘 진지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한다. 그리고 보좌로부터 주어진 두루마리 책을 취한다. 그리고 7인이 봉인을 풀고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 펼쳐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전재되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이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한대로 야곱의 4번째 아들 유다의 후손이다. 유다지파에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 다윗이 나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 왕으로 태어난다. 여기에 주목할 내용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 곧 메시야 왕으로서 예수님은 이미 이겼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6:33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다. 미래에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은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결론은 승리다. 단지 승리까지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어린이들 만화를 읽는 기분이다. 주인공은 반드시 이기도록 설정되어 있다. 누구나 만화의 결론은 주인공이 이길 것을 안다. 당연히 주인공은 선한 자이다. 만화를 보는 자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겪고 또한 어떻게 이기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초초해 가면서 읽는다. 기독교인의 세상과의 투쟁이 그러하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이미 이긴 자가 되었는가?

성경에서 왕이란 대표자개념을 가진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이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 전에는 사람 개개인을 하나님이 보셨다. 그러나 왕이 주어진 후부터는 하나님은 백성을 대표하는 왕을 본다.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보이면 백성은 복을 받는다. 그러나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하면 백성이 그 대가를 치룬다. 그렇게 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지는 자이다.

예수님은 메시야 왕으로서 오셨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였다. 그러한 증거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다.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연합이란 의미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곧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 걸머지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인간을 대표하는 행위인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 승리하심으로 최초의 인간 아담이 유혹을 받아 실패한 것을 회복 시키신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다. 마침내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생명에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요한계시록은 일찍 죽으심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미 이긴 구속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시기에 두루마리 책을 받아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이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이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의미다. 누가복음 2:34에서 선어하였듯이 예수님은 심판의 기준이 되신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의 기준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의 권세가 예수님에게 주어졌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2-24).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1

인사건(6) - 말세 예측서

예수님이 인을 떼면서 말세()에 일어날 하나님 심판의 사건들이 전개된다. 인 사건을 읽다 보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세에 관한 말씀과 닮아 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말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과 연관하여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자, 제자들이 어느 때에 이런 일(성전건물의 무너짐)이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으리이까?”라는 물으면서 말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

 

말세에 일어날 예측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70년 무너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무너진 성전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 신약의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예배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사하기 위한 제사예배는 사라졌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죄를 사하기 위한 제사는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렇게 하나님 심판의 기준은 정해졌다. 예수님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다. 심판의 기준이 정해졌다는 의미에서 말세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말세들이다. 마태복음 24:6에 의하면 아직 세상 끝은 아니다. 성경은 말세()과 종말을 구분 짓고 있다. 종말이 세상 끝이다.

하나님 심판을 그리고 있는 인사건 중에서 6번째 인은 세상 끝이다. 그리고 1-5인은 말세에 대한 하나님의 예측서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에 대한 예측서다. 세상 끝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마태복음 24장에서 일어날 말세의 징조에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계시록 인사건(6)에서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2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마태복음에서는 (1)미혹 (2)분쟁 또는 전쟁 (3)기근 (4)지진 (5)교회의 환난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순서대로 요한계시록 인사건도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인 : 미혹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예수님이 첫 번째 인을 떼자 흰 말을 탄 자가 등장한다. 흰 말을 탔다고 해서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곧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2-4인은 좋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왜 첫 번째 인만 다르냐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마태복음의 내용과도 맞지 않다. 말세의 징조를 말하면서 마태복음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미혹사건이다.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교회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격하는 이론과 사상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고 심지어 세상의 논리가 교회까지도 침투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16장에 등장하는 아마겟돈 전쟁이란 입의 전쟁이다. 곧 사상 전쟁이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세계는 마침내 동성애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동성애 옹호가 교회에서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하는 것을 어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인권이란 이름이, 인간주의적 온정주의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이 되어야 할 교회조차도 인간중심 인권중심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상논쟁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흰 말을 탄 자가 활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19장에도 흰 말을 탄 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칼을 가졌다. 당연히 19장에서 흰 말 탄 자는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 사건에서 흰 말을 탄 자는 활을 가졌다. 성경에서 활을 가진 사냥꾼으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자가 창세기 10:9의 니므롯이다.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용감한 사냥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서 앞에이란 말은 대항하는의 의미를 가진다. 곧 니므롯은 여호와를 대항하는데 용감한 자였다.

 

두 번째 인 : 전쟁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서부터 타락한 인간의 역사는 처음부터 전쟁의 역사였다. 붉은 색깔은 피의 색깔이다.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는 역사다. 이는 단지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분쟁일수도 있고 개인의 욕심을 포기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개인 서로간의 다툼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가장 큰 분쟁이다. 마태복음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종교 전쟁일수도 있고 인종간의 전쟁일수도 있다. 인권과 인권이 서로 부딪히는 전쟁일수도 있다. 인간의 전쟁 역사는 땅을 소유하고자 함에서 비롯된다. 무엇인가 소유한다는 것은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의 역사이다. 그리고 언제나 전쟁은 비극이다. 참혹함이다. 하나님의 간섭을 거부한 인간의 역사, 하나님은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 하나님 심판의 무서움을 보라고 경고하신다.

 

세 번째 인 : 경제적 불평등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검은 말이 등장하고 손에는 저울을 가졌다. 마태복음은 기근을 말하고 있다. 먹거리 문제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자들이 있다. 세상은 이제 무엇이든지 돈으로 가치를 정한다. 경제적 부요가 힘이 되는 세상이다. 세 번째 인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제적 불평등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이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다. 그것으로 겨우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점점 벌어진다. 아무리 정부가 양극화를 줄어보고자 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성경은 마지막 끝 날이 가까워질수록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을 예측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세상이다. 무엇이든지 돈으로 말해지는 세상, 언제부터인가 개천에서 용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신분의 계급은 없어져도 돈이 보이지 않는 계급을 형성하는 세상, 더욱 더 심각해지는 양극화 현상

 

네 번째 인 : 죽음의 문제

[6:7]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인간은 결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결국은 죽는다. 창세기 5장에서 무드셀라는 969년을 산다. 무려 1000년이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은 이렇게 말한다. 1000년 가까이 살더라도 결국은 죽는다. 그런데 4번째 인사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상치 않은 죽음이다. 세상 끝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예상치 않은 죽음이 넘쳐 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전쟁. 다툼)과 흉년(기근)과 땅의 짐승(제도적 권력)에 의한 죽음은 자연적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그냥 사망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자연재해 같은 것이다. 마태복음은 지진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리 인간의 과학이 발전해도 자연재해를 막지 못한다. 지진, 쓰나미, 태풍 등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 있다. 여기에 인간은 자신의 약함을 고백해야 한다. 여기에는 과학의 발전이 만들어 낸 죽음도 있다. 점점 예상치 못한 죽음이 도처에 깔려 있는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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