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읽기 3

by wgma posted Nov 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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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읽기 3

 

팔복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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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태복음 1:1-2)

 

진리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배워서 아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14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인간 아무리 깨닫고자 하여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로마서 3:11)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더군다나 스스로 깨달아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고, 구원을 얻는 길을 알려 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다. 무엇보다도 병의 치유를 받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따르는 자들 곧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특별히 사도로 세우실 12명의 제자를 직접 부르셨다. 이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입을 여신다. 그렇게 산상에서의 설교가 시작된다. 우리가 흔히 팔복으로 부르는 것으로부터 산상설교는 시작된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성격을 시정하고자 하신 적이 없다. 베드로의 급한 성격, 안드레의 신중함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불같은 성격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말의 실수가 많으니 말을 그만 하라고 하면 우울증에 빠진다. 말이 없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권하면 사람 기피증이 생긴다. 말 많은 사람은 말 많은 대로 말수가 적은 사람은 적은대로 두어야 한다. 그렇게 둘은 조화를 이룬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것은 인격이다. 인격이란 방향이다. 제자들의 성격이 아니라 제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셨다. 입만 열면 남의 이야기를 하고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자의 말 수를 줄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복음을 전하고 남을 칭찬하는 방향으로 입을 여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촐랑거린다는 말보다 그 사람은 참으로 민첩한 사람이야라고 하면 듣는 자가 유쾌하다. 굼뱅이라는 말보다는 그 사람은 참으로 신중한 사람이야 하면 그 말이 칭찬하는 말이 된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어떠한 단어를 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이는 것이다.

팔복은 이렇게 하면 이러한 복이 주어진다는 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 팔복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부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팔복을 소유하고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복 받는 인생으로 보면 산상설교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해 진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갖추어야 할 8가지 인격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팔복이 지향하는 인격의 절정은 7번째 등장하는 화평케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화평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화평케 하는 인격이야말로 기독교 인격체의 절정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화평 또는 화해이다. 어떻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가? 화평케 하는 자는 우선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린자 그리고 긍휼 청결함의 6가지 인격을 바탕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화평케 하기 위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마지막 8번째 인격의 소유자가 된다.

 

팔복은 행복한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팔복에 쓰여진 복이란 단어는 행복이란 의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여야 팔복이 제대로 보인다. 왜 행복합니까?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렇게 팔복은 읽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들어 인간이 거기에 살도록 하셨다. 에덴이란 행복 또는 기쁨이란 의미이고 동산이란 울타리란 뜻을 가진다. 당연히 울타리는 하나님이 되어주신다. 인간은 하나님이 울타리 되어 주시는 에덴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은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에덴의 울타리를 거절했다. 하나님이란 울타리가 없어도 인간 스스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에덴의 회복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행복된 삶이란 이렇게 찾아온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참 행복 참 기쁨이란 이런 것이다고 알려주신다. 행복이란 소유 [얼마나 가졌는가?]나 성취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

 

여기에서 너희는 복수다. 그리고 이란 가운데로 보아야 한다. 너희들 가운데에 있다곧 너와 나 사이에 곧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가 에덴동산이다. 하나님 나라 곧 에덴(행복)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주어진다. 디모데후서 3:17은 기독교가 지향하는 인격에 대하여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인격은 언제나 관계를 통하여 나타난다.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 인생은 행복해진다는 것이 성경과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디모데후서 3:17은 두 가지 관계를 말한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를 신앙인격이라고 부르고, 사람과의 관계는 선한 인격으로 부를 수 있다. 선한 인격이란 말은 남을 대할 때는 언제나 살리는 자로서의 방향을 갖는 것을 말한다. 십계명을 보더라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타인과의 바른 관계 맺기에 대하여 말씀 하고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러한 두 종류의 관계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나타나는 신앙인격에 대하여 1에서 4번째까지, 그리고 사람과의 바른 관계로 나타나는 선한 인격에 대하여는 5-8번째까지로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이 팔복의 구조이다.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곧 신앙인격과 선한 인격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이 팔복을 통하여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다.

 

팔복은 천국에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을 맺는다

 

천국이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다스려주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다시 에덴(행복)의 울타리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좋은 장난감을 주어도 부모가 옆에 없으면 그 장난감이 전혀 즐겁지 않은 것과 같다. 부모가 눈앞에 보이면 그때서야 장난감이 좋은 것이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이 나의 생각을 나의 선택에 내가 살아가는 발걸음조차도 다스려 주실 때 나는 행복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행복한 이유는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내 삶의 울타리가 되 주시기겠다는 것이다. 마치 고아가 부모를 찾은 것과 같다.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서도 함께하여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팔복을 통하여 예수님이 알려주는 진리는 이렇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당신의 삶이 진정 행복한 삶이다.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주신다면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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