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8-9

by wgma posted Dec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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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9

 

마음이 청결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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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인격이란 방향이다. 기독교의 방향은 상대방을 살리고자 함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곧 방향은 죄인된 인간을 살리고자 함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이다. 살리고자 하여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 이를 선한 인격이라고 한다


선한 인격은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인격자의 그릇이 먼저 되어야 한다. 사과 열매가 열리는 것은 그 본 바탕이 사과를 열리게 하는 사과나무이기 때문이다. 선한 인격자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신앙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팔복의 1-4까지는 신앙인격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다가간 자의 하나님의 은혜 또는 사랑에 배부르게 된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너를 향해 다가가게 한다. 너와의 관계를 맺는데 그 바탕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그 풍성한 은혜요 사랑이다. 이제 우리는 선한 인격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그릇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너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예수님은 5번째에서 8번째까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 방향이 5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란 나의 입장이 아닌 너의 입장 곧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다가가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아픔과 기쁨, 분노와 좌절 그리고 소망을 이해하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청결한 마음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첫 번째 팔복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여섯 번째 팔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심령과 마음의 의미는 다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의 의미가 여섯 번째 팔복에 등장하는 마음이다


마음이란 용어를 가슴이란 의미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중심으로 또는 진심으로의 의미로도 통한다. 그럼 마음이란 용어가 실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해되어 지는가? “그 사람이 마음에 쓰인다.”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진심으로 그 사람에 대하여 생각이 가는 것 그것이 마음이 쓰인다는 의미일게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하여 청결한 생각을 갖는다고 이해하면 된다.


청결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순결하다 깨끗하다는 의미이다. 상대방에게 순결한 생각을 가지고 다가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검은 종이에 검은 펜을 가지고 그 무엇을 써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가득히 써있는 종이에 글자를 써보라. 그 글자는 이미 써 있는 글자와 섞여서 어떤 내용인지 모를 수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써있지 않는 종이에 글을 쓰면 그 글은 선명하게 들여다보인다. 내 생각을 담지 않고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진 지식이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이 말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청결한 자이다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보아주는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청결한 마음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 곧 상대방을 참으로 이해하고자 다가가고자 한다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한다. 나의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면서 다가가면 상대방을 바로 볼 수 없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을 인내 또는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팔복에서 청결한 마음은 인내 또는 참는 마음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란 입술을 깨물고라도 참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3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란 어떤 행동을 나타내 보이는 것인가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이다


오래 참음으로, 인내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론으로 등장하는 것이 참는다는 단어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이야기 한다. 1.상대방의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2.상대방의 약점을 허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3.상대방 때문에 생기는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정말 힘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너를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미 내 나름대로의 옳고 그름의 판단(생각)이 서 있고 그래서 너에게 다가갈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타날 때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입술이라도 깨물면서 참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참일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이러한 참음 인내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 한계를 넘어가면 폭발하고 만다


너에게 다가가는 만큼 나의 상처가 쌓인다. 그래서 참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이제는 너를 이해하고자 함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너로부터 이해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란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오래 참음으로 인간에게 다가 오셨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절하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죄 가운데에서 자유케 하기 위하여 스스로 사람이 되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를 베드로후서 3:9에서 이와 같이 표현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인내하는 마음은 판단하지 않음에 있다!

 

청결한 마음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인내함이란 용어로 나타내 보인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청결한 마음 인내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판단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이 늘 경계하신 말씀 중에 반복해서 하신 것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판단하는 마음이란 나의 잣대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판단하지 않는 마음은 이미 긍휼한 자가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다가가는 자가 나의 잣대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방의 방식 상대방의 잣대로 다가가가는 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 곧 상대방을 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자는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청결한 마음을 가지는 자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다 왜냐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결코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내가 너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고 상대방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오해하고 힘들게 한다. 그래서 이러한 나의 마음을 상대방이 이해해주기를 기다린다면 상처가 남는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확신있는 삶이다.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확신이다


잠언 3:5-6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팔복 3번째는 온유한 자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자이다


6번째 팔복인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러한 온유한 자와 관련이 있다. 상대방에게 청결한 마음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자는 온유한 자의 마음 곧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자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은 길을 지도하여 주신다. 하나님을 본 자이다.

김성철목사의 산상설교 읽기 8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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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격의 특성

복있는 자 - 행복한 자

하나님을 향한 인격(신앙인격)

1.심령이 가난한 자 - 하나님의 다스림의 시작

2.애통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로함

3.온유한 자(맡기는 자) -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오는 안식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하나님의 은혜(사랑)에 배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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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의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 복까지는 사람을 행한 인격을 다루고 있다. 사람을 향한 인격은 선한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한 인격이란 살리는 인격을 말한다. 인격이란 방향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남과의 관계에 있어서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첫 번째가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4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인격과 사람을 향한 선한 인격 사이에 서로 연결고리가 된다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사랑)에 배부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란 값없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배부른 자가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정신은 주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 싶어도 줄게 없으면 줄 수 없다. 팔복에서 복있는 자란 행복한 자를 말한다. 행복이란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온다. 인간관계는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 받는 것이 없이 마냥 주기만 하면 지쳐버린다. 지치면 포기하거나 폭발한다. 긍휼히 여긴다 하면 자비라는 말과 연관이 된다. 자비심이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유가 없다. 자신도 남의 자비가 긍휼함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도저히 긍휼히 여길 수가 없다


성경에서 보면 무엇을 하든지 억지스러움이 없다.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까지 힘써 연습해야 한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자연스러움이 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에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연습이 있다. 그렇다면 남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연습해야 하는가? 그것은 배부름의 연습이다


미움이 가득한 자가 그 미움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남을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하는 것 자체가 싫은데 용서하는 척조차도 어렵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심을 베푸는 것을 연습하라는 것이 아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배부른 인생인가를 연습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4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인생의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긍휼히 여기는 인생의 시작이다. 선한 인격자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쉽게 말해서 십자가에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다. 그 사랑에 배부른 자가 되면 긍휼함이 따라온다.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깊이 생각하라. 그 사랑에 배부르게 되면 비로소 상대방이 보인다. 내가 아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두려움과 고통이 보인다. 그리고 긍휼함이 뒤를 따라온다


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상대방에 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이 얼마나 내게 엄청난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 감격이 이제 나로 무엇인가를 나에게 하도록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도록 한다고 고백한다(고린도후서 5:14).

 

궁휼히 여긴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이혼하고자 하는 분에게 언제나 물어보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불쌍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혼하게 되면 이러저러한 면이 신경이 쓰인다고 답하는 자는 이혼하지 않을 확율이 높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해 어는 정도의 이해가 있다는 말과 같다


이해라는 영어는 understand이다. ‘아래에 서있다는 의미이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긴다고 할 때 조심할 것은 상대방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때론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그때 상항에 대하여 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오병이어)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셨다(마가복음 6:34). 예수님은 당시 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셨다. 당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도 예수님을 만나면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처절한 기대로 예수님을 마냥 따라 다니는 상황들을 예수님은 이해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이들을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마침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 긍휼하심이 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팔복에서 긍휼이 여김은 상대방 이해하기이다. 선한 인격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노여움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면 선한 인격이 나올 수 없다. 긍휼히 여김이 나올 수 없다. 상대방의 고통을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여기에 긍휼함이 나온다


내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온다. 인간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은 먼저 받으신 것이다. 곧 이해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그 결과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말은 단지 이해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안다면 그 아픔과 함께 하는 것, 상대방의 기쁨을 안다면 그 기쁨에 함께 해주는 것 이러한 삶이 진정으로 긍휼히 여기는 삶, 상대방을 이해하는 삶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이해하는 자)가 긍휼함을 받는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라는 것이 인생의 황금률이다.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 진실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그 정성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답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노여움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답니다. 돌아서는 사람의 그 마음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돌아오질 않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방식으로 사랑하라. 이것이 사랑의 기본이다. 상대방의 마음과 진심 그리고 노여움과 미움을 이해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랑은 거짓의 옷을 벗게 한다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울분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성경들 들여다보라. 그러면 성경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주면 받는다. 이해해주고 상대방의 마음과 함께 해주면 나도 그 함께 해줌의 행복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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