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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교육과 가르치신 교훈하신 내용

(마태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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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론만으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각가지 문제들을 직접 말씀으로 혹은 어루만지며 때로는 명령하시며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시면서 인생들의 영육의 문제들을 해결해주셨다. 8장에 이어서 계속되는 시청각 교육의 모습과 현장에서 가르치시며 교훈하신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8)

예수님이 본 동리(가버나움)로 돌아오시니 사람들이 또 몰려들었다. 이때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 채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는지라 지붕위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 채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막2:1-12, 눅5:17-26, 참고) 참으로 기막힌 광경이 벌어졌다.

중풍병자(Paralytic)는 뇌출혈로 인해 발병한 중풍병을 앓는 사람을 말한다. 중풍병은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로 뇌동맥이 파손되어 일어난 출혈이 원인이 되어 발병하고 전신이나 반신, 또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이다.

성경에는 중풍병자들이 거동이 어려워 누워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마 8:6; 9:2; 막 2:4; 눅 5:18; 행 9:33). 또 누워 지내던 중풍병자들이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자 즉각적으로 나은 것(마 8:13; 막 2:11-12; 눅 5:25)과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침상을 들고 갈 정도로 회복된 것(마 9:6; 막 2:12; 눅 5:25)도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친 기적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 즉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마 9:6; 막 2:10; 눅 5:24).

지붕 뚫은 중풍병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지붕에서 내려진 중풍병자를 보시고, 옆에서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치유를 위해 찾아온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선언하셨다. 이 죄 용서의 선언은 한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죄악을 향한 자유와 해방의 선포였다. 한편 죄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던 서기관들은, 죄 사함 선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레 24:11)라며 분노했다(막 2:6-7). 그 당시 죄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았거나 불경죄를 짓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셨음을 명백하게 드러내셨고(막 2:10), 치유의 능력도 가지신 분임을 확실하게 증명하셨다(막 2:11).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이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는 도다’하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께서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하는 권세(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이런 권능을 부여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권세(權勢, Authority)란 남을 복종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 성경에는 왕(삼하 3:6; 왕하 10:34)이나 하나님(롬 13:1), 예수님(마 7:29; 막 2:10; 계 12:10)의 권세는 물론 음부의 권세(시 49:15; 89:48), 어둠의 권세(골 1:13) 등도 언급되었다.

바울은 그 당시 여인들에게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위에 둘찌니라”(고전 11:10)고 권면했다. 또한 세상 정부가 가지고 있는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롬 13:1), 모든 권세의 머리는 예수님이라고 했다(골 2:10). 그리고 요한은 세상의 마지막에 사탄의 권세가 잠시 득세하지만 결국엔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당할 것을 예언하였다(계 12:10; 13:2; 17:12-14).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일에는 수많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작했다가도 도중에 포기 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 등장된 네 명의 사람들은 도중포기를 하지 않고, 정상적인 상식이 아닌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서 결국 뜻을 이룬 사람들이 되었다.

둘째, 서기관들의 생각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 하신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을 하는 참람한 말을 한다고 생각 했다. 여기서 율법선생이라 자부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서기관, 이들은 지금으로는 성직자, 성직교사라 할 만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서기관들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무엇인가?

전통적인 사고와, 제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활동은 무한하게 자유로운 분이고, 인간들의 전통 지식을 초월하신 분이고, 혹은 수천 년, 수백 년 전통을 뛰어 넘고도 남는 분이시다. 하지만 직업적인 성직자들은 항상 전통적인 제도 내에서 가진 지식으로 판단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려 한다. 그래서 도리어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역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법을 만드신 이가 누구며, 죄를 규정하신이가 누구인가? 그분이 ‘죄 사함의 선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판단은 예수가 누군가를 모르는 무지에서 온 판단이다.

이 같은 현상은 21세기에서도 어쩌면 더 심각하게 서기관들의 생각이 21세기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차단하고, 억눌러 덮어 씌워서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적 그리스도적 행위가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면, 이 같은 사실을 믿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금까지의 제도에 억매인 의식과 생각을 벗어버리고, 무한하시고, 초월적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믿을 때, 침상에 들려온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어가는 21세기 기적을 만든다.

2. 직업인 마태를 부르심(9-13, 막2:13-17, 눅5:27-32)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랐다. 그리고 그날 마태의 집에 초대 되었다. 사실 당시에는 세리라하면 사람들이 매국노 취급을 해서 상종을 잘 안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참 인기가 상승해 가는 예수께서 따르라고 부르시니 마태는 큰 감동이 되어서 일까,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려 놓고 예수님을 초대했다.

세관(Tax booth)은 세금을 거두는 사무소를 말한다. 신약 시대에 로마 정부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해 만들었다. 세금을 거두는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마 9:9; 막 2:14; 눅 5:27) 가버나움 세관은 통관세를 받는 세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가 상주할 정도로(눅 7:1-10) 중요한 도시였으며 다메섹에서 지중해 해안을 거쳐 두로, 예루살렘, 애굽에 이르는 교통의 통로이자 중심지인 까닭에 이곳에 세관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마태(Matthew)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그는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마 9:9). 그의 아버지는 알패오였는데(막 2:14), 이는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와는 다른 인물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처럼 친형제일 경우 그 관계를 밝히고 있는 반면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라는 이름이 마가복음 2:14과 누가복음 5:27, 29에서는 레위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해 어떻게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데(마 1:1-16; 2:5-6; 26:31 등), 이는 마태가 구약의 많은 책들을 인용할 만큼 학식이 충분한 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회개와 선교에로의 부르심’(마 11:20; 28:18-20), ‘신앙의 순종’(마 16:24)이 강조된 것은 마태 자신의 즉각적인 순종과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가장 유대적인 복음서를 쓴 그는 자신의 종족인 유대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과 예배를 가르치기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마 5:17-18).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는 가버나움(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변에 위치)의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세리였다(막 2:1, 14). 그 당시 세리는 창기와 도둑, 그리고 살인자와 함께 천한 자로 취급받던 자리였다(마 21:31).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셨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만난 곳이 회당이나 바닷가가 아닌 곧 세관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즉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마 9:9; 눅 5:27-29).

이 자리에는 다른 세리도, 죄인들도,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도 동석을 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겐 의사(의원)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1-13) 하셨다.

죄인(Sinner)이란 죄를 지은 사람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서 죄인을 판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시다(창 13:13). 이는 도덕적, 윤리적인 죄(갈 5:19-21)를 범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죄(요 8:24),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게 대적하거나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도 죄인이라고 했으며(삼상 15:18)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 또는 악인과 같은 뜻으로도 쓰여 졌다(시 1:1, 5; 104:35; 잠 13:21; 23:17).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고(마 9:11), 사람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들으셨다(눅 7:34).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마 9:13; 눅 5:32)고 하시며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 구원에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건강(Health)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바르고 건실하며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구약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시 39:13) 요청했고, 잠언 기자도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마음에 간직할 때 ‘건강하다’(잠 4:22)고 적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여러 병든 자들을 고쳐 건강하게 하셨는데(막 5:34), 이로써 자신이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오신 분임을 밝히 드러내셨다(마 9:12; 막 2:17; 눅 5:31).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필요 없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눅 5:31) 이는 공관복음 모두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마 9:12; 막 2:17; 눅 5:31). 여기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 병든 자는 세리, 의원은 예수님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병든 자로 여겨졌던 세리들이 외적인 병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면, 바리새인들은 내면의 고질적인 병을 앓고 있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경계하셨던 것이다.

의원(Doctor)은 오늘날 의사를 말하며, 성경에서 의원이라고 소개된 사람으로는 누가가 있다(골 4:14). 의원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는 말로 죄인들과 식사한다는 서기관들의 비난을 일축해 버리셨다(막 2:17; 눅 5:31). 또 예수님께서는 많은 의원에게 보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자를 고쳐 주셨다(막 5:25-27). 한편 역대기 저자는 아사 왕이 병이 들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해서 결국 죽었다고 했다(대하 16:12).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생각 해 보고자 한다.

하나는 마태의 입장이다. 당시의 세리(세금을 거두는 관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백성에게서 세금을 거둬드린 사람이다. 요즘 말로하면 세무공무원 이었다. 우리나라 건국초기에는 세무공무원이 되면 부자 되는 건 일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예수님이 마태를 만난 시절에도 세리가 되면 부자로 잘 살던 시절이다. 한마디로 돈벌이가 짭 잘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부르시니 그 자리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서서 사도가 되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복음서를 쓴 사람이 되었다. 마태 세리의 선택은 잘한 일인가, 잘못한 일인가? 이것은 독자가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사도의 길을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태(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잘한 일이 된다. 그것은 간단한 것이다. 이 길은 보장 없는 무보수의 길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돈을 생각하는 자는 처음부터 삯꾼이 되는 것이니까, 그저 세관에 앉아 있는 게 더 낳은 일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그분의 사역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도 복음은 사람들이 껄끄럽게 생각하고, 경계하고, 왕따를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야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예수는 웅장하게 집을 짓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신비스러운 파이프 올 갠 소리로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바리새 사람들이 되어 버렸을까? 이렇게 된 마지막 모습은 어떤가?(참조 약 2:1-4)

3. 금식 문제(막2:18-22, 눅5:33-39)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나누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면서 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선생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 할 것이니라.’

금식(Fast)은 음식 또는 물을 먹지 않는 것 혹은 대부분의 음식을 금하고 물과 간단한 음식만 먹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하루 금식이란 해 돋는 순간부터 해가 질 때까지를 의미했다. 구약에서 금식의 주제는 주로 ‘의’였다(슥 7:9-10). 하나님은 참된 회개가 포함된 금식에는 언제나 응답하셨으나(욘 3:5-10; 에 4:3, 16) 위선적인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사야 시대 백성들은 금식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으며(사 58:5) 이사야로부터 참된 금식과 그 결과에 대한 선포를 들어야 했다(사 58:6-8). 구약에서 합법적으로 금식해야 하는 때는 속죄일(레 16:29; 렘 36:6)과 BC 586년 후, 예루살렘 멸망을 기억하기 위해 금식하는 날(슥 7:1-7; 8:19) 등이었다.

성경은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 금식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막 9:14-29; 참고,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금식이란 말이 빠져 있는데 아마도 원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본다). 초대교회에서는 선교사와 장로들을 임명할 때 금식기도를 했다(행 13:2-3, 14:23).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인 훈련을 위해 금식기도를 한다. 특별히 육신의 욕망들을 통제하고 사역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금식한다. 그러나 금식은 업적을 쌓는 행위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지위를 얻는 방법도 아니다.

금식기도의 유익은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모세는 40주야를 금식기도하고 십계명을 받았으며, 다니엘은 10일 간 채식과 물만 먹으며 신앙을 지켰다(단 1:12-13).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칠 때 40주야를 금식하며 걸어서(왕상 19:8) 호렙 산에 도착하였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도 광야의 금식기도(마 4:2) 후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바울도 주님을 만난 직후 3일을 금식기도한 후에 사역을 했다(행 9:9-11).

건강의 유익으로 금식은 인간의 신체를 자연적으로 치유하는 능력을 활성화시켜 주고 몸속 의 노폐물을 깨끗하게 청소해 준다. 따라서 금식은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듯이 어떤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신의 유익으로도 금식하는 기간 중에는 잠재의식이 활발하게 작용하고 정신 집중이 잘 되어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은 공생애로 들어가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셨다(마 4:2).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동안 금식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마 9:14-15; 눅 5:33-35). 또한 예수님은 두 전통적인 금식일, 즉 화요일과 목요일의 금식 일에 경건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셨다(마 6:16-18). 사실 예수님은 금식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잘못하는 금식을 질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할 때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뿌리며 금식했다(느 9:1참고).

개인적인 문제로 금식한 사람들의 예를 살펴보면

1. 잉태치 못했던 한나(삼상 1:3-7)

2. 앓는 아이를 위해 기도한 다윗(삼하 12:15-18)

3.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은 뒤 금식한 다리오 왕(단 6:18)

공적인 문제로 금식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1. 에스라의 율법 낭독 후 국가적인 회개를 위해(느 9:1)

2. 이스라엘이 베냐민과의 응징전에서 패배한 뒤(삿 20:26)

3. 회개를 위한 사무엘의 미스바 집회에서(삼상 7:6)

4. 여호사밧 왕 때 유다가 모압의 침공 소식을 듣고(대하 20:3)

5.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욘 3:5-10)

6. 하만의 음모를 안 모르드개와 유다 사람들(에 4:3)이었다.

혼인(Marriage)이란 남자와 여자가 장가가고 시집가서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관계 가운데 하나로, 성경에는 이방인과는 혼인하지 말 것이 명령되어 있으며(신 7:3), 이방인과 혼인할 경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이 예언되어 있다(수 23:12-13).

구약에서의 혼인의 제도로 원래는 일부일처제가 창조의 질서였는데(창 2:18-24; 고전 6:16), 가인 이후부터는 일부일처제가 깨어지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궁중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인은 일부일처제였으며,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가운데 나타나는 인물 중에는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가 예외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혼인 때에는 남편 될 사람이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주었는데, 이것이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창 34:12; 출 22:15-16; 사 18:25). 보통 그 금액은 신부의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었는데, 대개는 50세겔 미만의 돈이었다. 또 혼인에서는 신부에게 선물이 주어졌는데, 창세기 34:12절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장식품 및 옷을 선물하고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풍성한 선물을 제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반대로 신부의 아버지가 딸에게 선물로 여종(창 24:59; 29:24) 혹은 토지(수 15:18)를 준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혼인 후에 준 것이었다.

또한 자녀들이 나이 순서대로 혼인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일찍 혼인을 했으며 혼인 문제에 있어서는 부모의 결정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혼인 이전에 약혼을 했는데, 약혼은 오늘날의 약혼보다 훨씬 더 공식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징집이 면제되었고(신 20:7), 타인의 약혼녀를 강제로 강간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신 22:25).

신약에서의 혼인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막 10:6; 고전 6:16). 그래서 바울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앙에 의해서 결혼을 금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비판했다(딤전 4:3). 또한 혼인을 믿음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고 재림의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하여 “아내 있는 자들이라도 없는 자와 같이”(고전 7:29) 하라고 말했으며 또한 순결을 강조했고(고전 5장) 이혼을 반대했다(고전 7:10).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를 혼인한 부부의 관계로 묘사하여, 자신은 고린도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다(고후 11:2-3).

예수의 혼인에 대한 입장은 일부일처제로, 이혼을 허용한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해 주므로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회복시키셨다(마 5:31; 막 10:2-12; 눅 16:18). 그리고 혼인 잔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어 복음서에서는 천국을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로 서술하고 있다(마 22:2-14; 눅 12:16-2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행하신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는데(요 2:1-12), 이는 예수님이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의 성취자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의 들러리로 말하며 예수님이 메시아 시대를 여신 분임을 말하고 있다(요 3:29).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도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신랑이 되셔서 그의 신부인 성도들과 결합하는 기쁨과 그 영광을 혼인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계 19:7-9; 21:2, 9).

신랑(新郞, Bridegroom)은 곧 결혼할 남자 또는 갓 결혼한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전통적인 히브리인의 결혼식에서 신랑은 보석과 아름다운 의상으로 단장한 신부에 못지않게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화려한 치장을 하였다(사 61:10).

결혼식 날에 신랑은 신랑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갔다(창 29:22; 삿 14장; 마 25:1-13). 유대인의 결혼 관습에 따라 혼인 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대개 해가 진 후 밤중에 하기 때문에 등불이 필요하였다. 예수님 당시 풍습으로는 신부의 친구들이 등불을 준비해야 했으며 등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큰 실례를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의 결혼 축제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이러한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하여 재림에 대한 교훈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마 25:1-13).

성경에서 신랑은 기뻐하는 자로 묘사되었는데(시 19:5; 사 62:5) 이것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이 결혼식 날 기쁨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성경에서 신랑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62:5). 예수님도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비유하셨다(마 9:15). 이러한 비유는 세례 요한의 말(요 3:29)과 사도 바울의 글(고후 11:2; 엡 5:23-25)에서도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님의 모습과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계 19:7; 21:2).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매년 속죄일에만 회개의 행위로 금식하라고 규정해 놓았으나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경건의 행위로 금식을 했다(눅 18:12). 이에 대해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드시던 예수님께 한 사람이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막 2:18).

예수님께서는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손님들이 금식하지 않듯,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금식하는 것이 적당치 않다고 하셨다. 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동안은 잔칫날 같으나 언젠가 상황이 변해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며, 그때에는 슬픔의 의미로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막 2:20).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에 대해 마가복음에서 말씀하신 첫 번째 암시였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자가 기뻐한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가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은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하는 신랑의 친구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요 3:28-29).

유대인들에게 신랑의 친구는 결혼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혼 기간 동안 신랑과 신부 사이의 교량역할을 한다. 결혼식이 있는 날 신랑이 신부를 보기 위해 준비된 방으로 가는데, 그때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기쁨에 찬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이런 결혼의 풍습을 빗대어 요한은 자신이 교회의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요 3:29). 그래서 그는 자신은 쇠하고 그리스도가 흥하여야 한다고 말하였고(요 3:30), 또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요 3:29).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 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포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포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포대)도 버리게 됨이니라. 새 포도주는 새 포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 되느니라’(14-17)

생베(Unshrunk cloth)란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베(실로 만든 제품)를 말한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그 기운 옷도 해어진다는 비유로 예수님은 유대주의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 체제를 보강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이는 율법적이고 바리새적인 의로는 참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담아낼 수 없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마 9:16).

부대(Skin)란 물건이나 음료를 담는 자루를 말한다. 성경 시대에는 대개 짐승의 가죽을 이용해 부대를 만들었는데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며 물을 넣어준 것이 가죽 부대였다(창 21:14-15). 야엘이 도망치던 시스라에게 주어 마시게 한 우유도 이런 가죽 부대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삿 4:19). 신약 시대 가죽 부대는 포도주를 담아 두는 용기로도 쓰였다(마 9:17; 막 2:22; 눅 5:37-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는 것은 보통 중동 지방에서는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넣어 운반했는데, 낡은 부대는 약해져서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넣을 경우 터질 수도 있었다. 이에 빗대어 예수님은 생명력이 넘치는 예수님의 새 교훈을 유대교의 금식 같은 낡은 의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9:17).

새 포도주(New wine)는 새로 만든 포도주로 발효력이 강하여 새 부대에 넣어야 했다. 고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은 포도의 산지로 유명하여 새 포도주에 대한 언급도 성경에 많이 나온다(신 33:28; 대하 32:28; 느 5:11; 10:37, 39; 13:5; 시 4:7; 렘 31:12; 호 2:9; 4:11; 7:14; 9:2; 욜 1:10; 슥 9:17).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적인 관점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에 비유하셨다(마 9:17; 막 2:22; 눅 5:37-38).

당시에 요한의 제자들은 주로 유대교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광야의 외침을 듣고 요한에게 와서 제자들이 된 사람들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등등 소위 유대교의 개혁을 부르짖고 모인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방문한 자리에서 금식문제를 가지고 말하게 되었다. 이렇게 질문 한 것은 우리도, 또는 부패했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도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여기 논쟁의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회 개혁이나 지금 예수운동의 신약시대를 열어야 하는 시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새로운 신약시대를 맞이하면서 과거에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구습을 쫓는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다. 금식문제는 신앙행위를 표현하는데 하나의 양상(樣相)인 것이다. 새로운 신약교회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포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 옛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도리어 책망하는 태도로 질문을 하고 있다. 이 문제가 얼마만큼 심각한 문제인 줄 아는가? 옛것이 하나라도 도입되면 둘 다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가신지 2천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된 채, 숙제로 남아 있는 사건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율법과 복음의 분명한 구별이 되지 않고 예수가 없는 2천년의 세월을 보내 왔고, 지금도 그 어두운 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해 보고 싶다.

지금도 명확한 복음이 다스리는 세계가 되지 못한 이유는 옛 법인 율법과 새 법인 복음의 법이 혼합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혼합되어버리고 사용하지 아니하면 지금의 구조가 유지 될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을 도리어 합리화 하는 이론을 만들면서 유지를 시키려 안간 힘을 쓰고 있지만 그 결과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복잡하고 많은 문제만 일으키고 귀한 영혼들에게 가야할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 만 하는 모습들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언 하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 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28-31, 참고: 21-27)여기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롬 4:3, 갈 4:30)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율법과 복음이 혼합되어 있으면 복음(이삭)은 율법(이스마엘)에 눌려 핍박을 받고 바르게 행동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복음)과 종의 자녀(율법)가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으니 자유 하는 여인 사라는 하갈의 母子를 내어 쫓으라 고 한 것이다.(참고: 창21:8-12) 그런데, 로마교회가 되면서 율법과 복음을 혼합시켜 만들어 버린 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주도적으로 계속되어 온 것이 아닌가?.

그 대표적인 것이 ‘눈은 눈, 이는 이’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치룬 사건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 같은 사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는 가톨릭처럼 종교로 굳어 버리거나 아니면 유럽교회나 북미교회들처럼 결국은 많은 문제를 안고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혹은 무속 종교형태로 남아 명맥을 유지 해가는 일부는 있을 수 있겠지 만, 여전히 복음의 법(산상 보훈)이 하나의 상징적으로나 환상적인 이론으로 혹은 장차 끝 날에 가서 시행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답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는 우리의 신앙은 거짓위에 세운 집(모래위에 세운 집)이 되고 만다.

어느 목사님이 쓴 글을 읽게 되었다. 내용인즉 산상보훈의 가르침에서 ‘마카리오스’이론을 들먹이면서 예수 안에서 다 완성된 사건이란 것이라고 했다. 이분은 신약과 구약을 혼동하는 듯싶어 아쉬웠고, ‘마카리오스’ 이론이란 구약 율법을 두고 한 말을 예수가 말씀한 신약백성에게 주신 말씀까지 이 이론에 포함시키려는 모순을 범하고 있었다. 이런 사고(思考)의 신앙을 교리신앙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나친 교리신앙이 되어 버리면 엄청난 모순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대단한 지식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어린아이 손에 칼을 쥐어준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4. 열두 해와 열두 살(막5:21-43, 눅8:40-56)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과 말하고 있을 때 한 관리가 찾아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내 딸이 방금 죽었으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면 살아나겠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 두해 동안이나 혈루 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혈루증(Bleeding)이란 부인병으로 월경 이외에 자궁 출혈 또는 음부로 피를 흘리는 병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에 와서 겉옷 가를 만졌던 일이 적혀 있다(마 9:20). 이 일에 대해 예수님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고 즉시 병이 나았다(마 9:22).

겉옷(Robe)이란 제사장이 에봇 위에 입거나(출 28:31) 보통 사람들이 겉에 걸처 입었던 옷을 말한다. 겉옷은 중앙에 구멍이 뚫린 두꺼운 망토같이 생겼으며 앞으로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활동을 할 때는 주로 벗었으나(마 24:18; 요 13:4) 예의를 갖추어야 할 자리에서는 입었다. 밤엔 겉옷을 이불로 사용했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비록 저당 잡은 겉옷이라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출 22:26).

겉옷에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첫째,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낸 뒤, 맞춘다면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겠다고 했다(삿 14:12-13).

둘째, 욥은 재산, 자녀를 잃은 슬픔으로 인해 겉옷을 찢었다(욥 1:20).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지키게 하기 위해 겉옷 가장자리에 옷술을 달았다(민 15:38-39).

셋째, 예수님은 사람을 송사하여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 대해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셨다(마 5:40). 예수님은 자신이 죽은 뒤 제자들이 당할 핍박을 생각하시고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 즉 미리 무장하라고 하셨다(눅 22:36).

넷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져오라고 시켰다(딤후 4:13).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이 기사는 마가나 누가복음서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관리라 했지만 사실 회당 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로 기록되었고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혈루 병을 앓고 있던 여인 역시 12년의 긴 세월동안 투병을 하면서 수많은 의원들에게 재산마저 모두 탕진해버린 기사가 마가나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막5:26-27, 눅8:43) 이런 여인이 예수 소문을 듣고 하루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틈에 몰래 끼어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낳을 것이란 믿음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진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예수가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위로를 해 주고 있다.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속아 재산마저 탕진하고, 혈루 병이란(출혈의 병) 따로 격리 된 병으로 지치고, 절망적이고, 이젠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여인, 그것도 예수 앞에 당당히 나서서 병을 고쳐 달라고 요구 할 형편도 못된 처지, 회당장의 요청에 의해 가시는 길에 몰래 세치기해서 만진 예수의 옷자락, 포기하지 않은 그 가련한 믿음이 질고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구원받은 여인이 되었다. 믿음은 결코 포기 할 수없는 방법인 것이다.

5.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23-26)

혈루 병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막간에 끼었다가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이어진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들어섰을 때, 피리 부는 자들과 애곡하는 자들이 와 있었다. 유대 전통적 풍습에 사람이 죽으면 피리 부는 자와 애곡하는 자를 고용해서 울고, 피리를 불어야 했다.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어린 딸이 이미 죽었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이 아이를 보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 거기 있는 자들이 비웃었다. 예수는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소녀의 손을 잡으매 소녀가 일어났다. 사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살아 있어도 그는 죽은 자와 같은 것이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다.(살전 4:13-18) 잠잔다는 말은 깨어나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되어 있을 때 예수님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했다. 야이로의 딸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서 천국 론과 낙원 론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좋은 주제가 되기도 한다.

6. 눈은 뜨고, 입은 말하고, (27-31)

(1) 27-31은 소경들이 예수를 만나 눈을 뜨는 장면들이 나오고,

(2) 32-34까지는 말 못하는 벙어리들이 말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3) 35-38에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지처 있는 민중을 보신 예수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 꾼이 없으니 주인(하나님)에게 추수 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라 하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사건들은 예수를 만남에서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이 부분에서 육신의 눈, 육신의 입이 열려서 말하게 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보다는 영적 차원에서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러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라’(마13:13, 행전 28:26)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경(Blind man)은 시력을 잃었거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소경들은 가난했으며(마 9:27)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라고 명령하셨다. 구약에서는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고(레 19:14)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신 27:18). 또한 소경은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레 21:16-18).

소경이란 말은 상징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소경의 시력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회복시켜 주신 기록이 많이 나온다(마 9:27-30; 12:22; 15:30; 21:14; 막 8:22-25; 10:46-52; 요 9:1-7). 구약에는 소경이 눈을 떴다는 기록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사 29:18; 35:5; 42:7; 마 11:5; 눅 7:21).

성경에 나타난 소경의 발병 원인들을 살펴보면, 소경이 되는 것은 선천적인 경우도 많지만 후천적으로 눈에 상처를 입거나 심한 열병을 앓을 때(레 26:16) 눈이 실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트라코마(과립성 결막염)라는 질병에 걸리거나 녹내장, 각막 백반, 망막염, 백내장, 피질 실명, 막질의 결막염, 수정체 염증 등과 같은 질병이다. 눈병을 앓으면 파리가 좋아하는 고름이 나오는데 파리는 이것을 잠자는 어린아이에게 전염시켜서 어린아이들이 눈병에 걸리기 쉽다. 이런 질병 때문에 속눈썹이 상하거나 안구의 기능이 감퇴되고, 염증이 모래나 따가운 햇 빛, 더러운 것에 의해 덧나게 되는 경우 소경이 될 수 있다. 또한 출산 시 유아의 결막에 산도의 임균이 들어갈 경우에도 유아들이 소경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원인들 외에도 성경에는 엘루마처럼 죄에 대한 형벌로 소경이 되기도 했고(행 13:8-11)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시적으로 소경이 되는 경우도 나온다(행 9:3-9).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소경이 되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욥 4:7; 시 38:5). 그래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그 원인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자기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요 9:2).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 된 이유에 대해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죄로 인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일로 대답해 주셨던 것이다(요 9:3-5). 예수님은 고난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그 고난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도우시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보이시는가에 주목하셨던 것이다.

벙어리(Mute)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농아(聾兒)가 있고, 발성기관은 정상이어도 들을 수 없는 것 때문에 말할 능력을 상실한 청아(聽啞)가 있다.

성경에는 벙어리가 되는 원인 중 하나가 귀신에 의한 것으로 나온다(막 9:17; 눅 11:14).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벙어리가 되게 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에스겔을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게 하신 것과(겔 3:26) 아들을 낳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사가랴를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게 하셨던 것이 그 예이다(눅 1:20).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면 벙어리가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35:6). 예수님은 벙어리와 같은 장애인들을 고치시는 이적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사 29:18; 35:5-6; 42:7; 61:1)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셨다(마 11:5; 12:22; 눅 4:18).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4-15, 행 28:26-27, 사6:9-10)

이사야가 이런 예언을 한 것은 유대백성이 전통적 규례만 지키면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만 생각하고,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지만, 도리어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핍박하고, 죽이는 짓을 계속해 온 그들인지라, 마침내 하나님은 유대백성을 망하게 하시기로 작정 하시고, 그 계획을 선지자에게 전달하신 것이다. ‘이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라’고 저주를 해버린 말씀이다.

하나님은 회개 할 것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포기하시고, 지금까지의 판을 뒤 엎어 버리시고, 계획을 다시 짜야 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예언해 놓은 기록이 바로 이사야 6장의 기록이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사:13: 상) 이 예언대로 유대나라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1차, 2차, 3차 4차, 유대 왕 시드기아를 끌어가서 두 눈을 뽑기까지 무려 20번이나 걸쳐 포로로 끌어가고 유다 땅은 초토화가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6:11-13)마침내 유대 나라는 패망을 당하게 된다(참고:왕하 24:14-17, 렘 39:6-7, 52:10-16)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사건을 말하면서 왜 유대나라 패망의 사건을 말하는가? 육신의 눈 보다, 하나님의 뜻을 보고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훨씬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1세기 교회는 눈을 떠야하고, 큰 소리로 외쳐야만 하지만, 자기 일신의 불이익을 두려워, 침묵으로 일관 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활동을 유기하는 행위가 된다. 복음이 증거 된 곳에서는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야 하고, 귀신들이 쫓겨나는 역사가 따라야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길게는 2천년 짧게는 5백년 사람의 유전으로 전통을 삼아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 장애인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가짜가 진짜행세를 하고, 진짜는 초라하게 가짜의 시녀가 되어 살아 온 세월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이제라도 밝혀주신 하나님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7. 추수와 일꾼(32-34)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37-38)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밭에 심은 곡물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어느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왜 이 말뜻을 알아야 하는가는 우리의 사역이 허공 치는 사역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36-) 이 말씀을 하시고 추수 꾼 이야기 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 목자가 없단 말은 백성을 돌볼 지도자들이 없다는 말인데, 이때 이들에게는 제사장도 있었고, 서기관들도 있었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도 있었고, 믿음을 자랑했던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활동하신 가버나움에는 회당장도 있었다. 그런데 왜 목자가 없다고 하셨을까?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부터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교의 지도자로 오신 분도 아니고, 유대교를 위해 봉사하려고 오신분도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구약)의 예언을 따라, 그것을 완성하셔서 신약백성을 찾아 신약시대를 열기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래서 아무리 제사장들이 있고, 서기관, 무슨 산헤드린 공의회, 회당장,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들이 새로 시작하는 신약시대의 목자들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민중을 보시니 신약백성 될 자들이 무수히 많은 것이다. 그들을 부르셔서 신약시대를 열어야 하겠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추수 꾼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제자들 몇 사람으로 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추수 꾼을 더 보내 달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과거의 무대(구약)에서, 새 무대(신약)를 준비하는 일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 ‘하나님의 일’(요 6:29, 마 16:23)이라 하면서 서기관 학교엘 가야하고, 바리새파 교육을 받아야 하고, 회당장이 되어야 하고, 명예를 얻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기 위해서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잘한 짓이라 하겠는가, 멍청한 짓이라 하겠는가? 답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구속사가 하나님의 계시진행을 따라 어느 지경에 이르면, 반드시 무대를 바꾸면서 진행해 왔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바꿨느냐 하면 처음 틀이 망가지고, 기득권층이 형성되면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전통적 유전이 그 자리를 대신 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나님은 새 틀(무대)을 만드신 것이다.

지금 유대교가 창설 된지 4백년이 지나면서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등장은 한계에 와 있는 유대교를 마감하고 신약교회를 시작하셔야 했다. 이와 같은 역사는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계속 되어 온 것이다. 중세교회가 이 자리에 와 있을 때, 하나님은 개혁자들을 부르셔서 개혁교회를 시작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문제는 바로 지금 이 시대다. 개혁교회가 시작한지 2016년(1517년. 10월/95개항의 게시 된 날로 부터) 이면 5백년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개신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른 판단이 필요하다. 이대로 유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전 세계 개신교 상황을 보고, 또는 지금까지 구속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진행과정을 볼 때, 다음무대가 필연적으로 준비 될 것이라고 생각 하지 않는가? 이것도 한번쯤은 바르게 판단하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8. 목자 없는 양(35-38)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회당(Synagogue)이란 유대인들의 모임 장소를 말한다. 회당 제도는 포로 생활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게 되면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유대인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행 13:5). 유대인들은 안식일 외에도 회당에 자주 모였는데 남녀가 따로 떨어져 앉았다.

회당의 주된 용도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는 남자 10명이 모여야 이루어졌다.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를 드린 후 쉐마를 읽었다(신 6:4-9). 쉐마를 교독한 후 다시 기도문을 암송하며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축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이 손을 들고 민수기 6:24-26로 축도함으로써 예배를 폐했다.

예수님은 여러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도 드리시고 말씀을 전하셨으며(눅 4:15) 병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셨다(막 1:39). 특히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서를 통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가르치셨지만 배척받으셨다(눅 4:16-30). 바울도 회당 예배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전도하였다(행 19:8). 회당은 율법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눅 13:10) 법정의 용도로도 쓰였다(마 10:17; 23:34; 막 13:9).

천국(Heaven)이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 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언급되었다(마 3:2; 5:3; 8:11; 13:11; 25:1 등). 일반적으로 천국, 즉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같은 말로 보며, 다만 마태복음은 하나님이란 말을 함부로 쓰기를 주저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부분 천국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은 메시아의 초림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재림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자는 서서히 성장하는 천국이며 후자는 돌연히 임재할 천국이고, 전자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이라면 후자는 초연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자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후자는 22, 25장의 천국 비유에서 그 형태를 찾을 수 있다. 결국 전자가 현세의 교회라면 후자는 미래의 영원한 구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천국은 별개가 아니다. 현재의 천국 없이는 미래에 실현될 천국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는 외침은 회개하고 메시아이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들어가라는 것으로, 현재 교회에서 자라는 신령한 천국에의 초대이며,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천국에의 보증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천국에 들어갈 조건은 혈통이 아닌 회개하고 메시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말해 준다(마 3:8-9).

(2)천국의 별칭들

1. 곳 간 : 천국은 곳간으로 불리운다(마 13:30).

2. 아버지 집 : 천국은 아버지의 집이라 불린다(요 14:2).

3. 안식처 : 천국은 안식처라 불린다(히 4:9-10).

4. 낙원 : 천국은 낙원이라 불린다(고후 12:4).

(3)천국의 특징

1. 천국은 높은 곳이다(사 57:15).

2. 천국은 거룩한 곳이다(시 20:6).

3. 천국은 행복한 곳이다(계 7:17).

4. 천국은 죽음, 눈물, 슬픔, 울음 또는 고통이 없는 곳이다(계 21:4).

(4)요한계시록 22장의 천국의 모습

1. 천국은 생명수가 흐르는 깨끗한 강과 12종류의 과실나무가 있는 아주 만족스런 곳이다(계 22:1-2).

2. 천국은 나라들을 소성하게 나뭇잎들이 있는 곳이며 모든 것이 찬란히 준비되어 있다(계 22:2).

3. 천국은 저주가 없는 완벽한 무죄 상태이며 에덴에 내린 저주는 인간에게서 영원히 사라진 곳이다(계 22:3).

4. 천국은 한 분인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완벽한 정부가 있는 곳이다(계 22:3).

5. 천국은 완전한 섬김이 있는 곳이다(계 22:3).

6. 천국은 완벽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곳이다(계 22:4).

7. 천국은 완전한 소유가 있는 곳이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만 속할 것이다(계 22:4).

8. 천국은 완전한 영광이 있는 곳이며 그 곳에는 인조 등이 없는 곳이다(계 22:5).

(5)천국에 사는 백성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0:10에 의하면 악마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누가복음 12:13에 의하면 도둑들도 결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또 “두려워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계 21:8)도 역시 들어갈 수 없고, 갈라디아서 5:19-21에 언급된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6:9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그 곳에서 살고 계시며 사도행전 3:2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신 후 그곳에 가셨다. 또한 마태복음 18:10과 26:53에 의하면 천사들과 무수한 피조물들도 그 곳에 있으며 창세기 5:24, 열왕기하 2:11, 마태복음 17:3에 의하면 하늘로 올려 진 에녹과 엘리야, 모세도 그곳에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죽은 모든 사람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살전 4:14).

추수(Harvest)는 익은 곡식이나 과일 등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말한다(창 45:6). 이스라엘에서는 크게 세 번의 추수를 하였다. 4-5월은 보리 추수를 하였으며(룻 1:22) 6-7월이 되면 밀을 추수하였다. 그리고 가을인 9-10월에는 과일이나 포도 등을 거두어 들였다(출 23:16; 신 16:13-16).

이스라엘에서 추수는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로 중요한 절기와 맞물려 이루어졌다. 보리 추수는 무교절과 오순절 사이에 이루어졌으며(신 16:9) 밀을 추수할 때 맥추절을 지켰다(출 23:16; 35:22; 레 23:15-21; 신 16:10). 그리고 가을의 추수를 끝내고 수장절을 지켰다(레 23:39; 신 16:13).

성경에서 추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인정하여 추수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레 19:23-25; 출 22:29)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추수할 일부를 남겨 두라고 명령하고 있다(레 19:9; 23:22; 신 24:19-22).

추수의 상징적 의미는 추수는 수고에 대한 보상(시 126:5-6),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잠 25:13; 렘 5:24; 호 6:11; 마 13:30; 막 4:29; 눅 10:2; 요 4:35; 계 14:15) 등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쓰였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꼭 필요한 시청각 교육과 함께 교훈해 주신 말씀들이지만, 이해를 못하는 분들에게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주저가 되면서,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말하고 전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하면서 지내온 필자 자신을 돌아보면서 지난날 은혜를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헌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신학교를 지원하는 이들에게 가지 말라고 한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하는 의식주의 목적과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한다. 이유는? 오늘 말씀에서 ‘추수 꾼’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이해를 다시 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추수 꾼이 서기관학교 출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먼저 받고 깨달은 자들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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