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성전되고 예배가 예배되게 하소서".....성경에 나타난 성전의 변천사를 보라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나서'....'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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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열리는 Nyskc World Conference 기간동안 새벽기도회 설교는 20년동안 NWM 대표회장 최고센목사이 감당하여왔는데 이날도 변함없이 새벽을 깨우는 통성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전했다

새벽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요2:13-22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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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성전의 변천사를 보면 노아, 아브라함의 족장시대에는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짐승의 피를 흘려 번제를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시대에는 성막예배를 드렸고 솔로몬 성전시대에는 성전 안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남유다, 북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하면서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포로로 끌려가면서 예배는 드려야 하는데 성전도 무너지고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기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있는 곳에서 회당을 만들어 거기서 토라를 중심으로 한 기도예배가 중심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배가 제물중심에서 말씀과 기도 중심의 예배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 완전하게 예배가 기도와 말씀 중심이라기 보다는 임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포로귀환 후에는 스룹바벨과 헤롯에 의해 성전이 세워졌지만 성전예배와 더불어 회당예배가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상시에는 회당에서 안식일을 보내시고 유월절이 되시면 규례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신16:16-1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라면 일년에는 세차례 곧 유월절(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을 세차례 지키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3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유월절-2:23, 두 번째의 유월절 6:4 세 번째의 유월절 여러 곳에 언급 11:55, 12:1, 13:1, 18:28, 19:14등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주인이요.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이 명하신 절기를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의 절기나 예배, 모임 등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꼭 교회에 가야 하는가? , 성경에 수요일 날, 금요일 날 모이라고 하는 기록이 없는데 왜 귀찮게 하는가?' '혼자서 성경보고 예배하면 되지 꼭 교회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할 수 만 있으면 모든 예배에 참여하여 말씀을 듣고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이야기인데 공관복음에 보면 이 장면은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 예수님의 고난주간에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공생애의 시작부분에 나옵니다. 사건의 이야기는 같아 보이는데 사건 발생의 시간이 다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은 공생애 가운데 한번의 사건인데 요한복음은 시간순으로 사건을 배열한 것이 아니라 의미상으로 배열하였기에 이 사건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으로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2회의 사건이 아니었을 까하는 쪽으로 더 크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관심은 성전이 성전다워지는 것이고 예배가 예배다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이 어떤 곳인가를 말씀하시길 원하셨고... 사역을 마무리 지을 때에도 여전히 성전이 성전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와 하시면서 또 다시 성전을 회복시키고자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나서 그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며 기도 드립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그러나 하나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대하6:18,21)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은 것에 감격하면서 이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한 곳이 되길 기도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5)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대하7:14-16)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을 성전에 항상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귀는 우리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면 주님은 그 부르짖음과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했습니다.(출6:5)

하나님의 눈은 주야로 쉬지 않고 성전을 살피시고 동시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그 눈물의 기도를 보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그 사랑하는 자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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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속이 성전 안에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눈으로는 보이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러데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보면서 위로를 얻기 원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전이 그 대상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인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를 바라보는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 어느 교단에서는 강대상에 십자가를 걸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만(왕하18:4) 우리는 십자가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떠올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대한 순종은 점점 잃어가고 의식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진솔한 고백과 순종 없이 성전자체에만 큰 의미를 부여하고 교만과 우월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월절이 되어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각자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모였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알맹이가 빠진 형식의 예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나올 때는 물질적인 것 두 가지를 준비해서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바치는 돈, 성전 세였습니다. 

20세 이상 된 유대인 남자들은 해마다 반 세겔을 성전세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출30:13-16), 로마 황제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은 부정하므로 돈을 유대나라 돈으로 바꿔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로마화폐를 히브리 화폐로 환전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장이나 다른 곳에서 환전하게 되었는데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다 보니 나중에는 성전 뜰에까지 환전상들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들의 형편에 따라 제물을 준비해서 나와야 했습니다.

특히 양을 두고 말하면 유월절 양은 흠 없는 1년된 숫양을 바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잡아 죽이는 양을 무엇 때문에 흠 없는 양으로 요구하셨을까요?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은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유월절 제사를 드리고 이어 곧 다음해 유월절을 위해서 제물을 준비합니다. 그 해 태어난 어린양 한 마리를 택하여 1년간 그 양을 정성스럽게 기릅니다.  그래서 1년 후에 그 양을 몰고 와서 유월절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대단한 정성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정성을 다해 자기들이 키우던 양을 데리고 성전으로 모였는데 거리도 워낙 멀고 길이 험하다 보니 사람도 힘들고 짐승들도 오면서 흠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서부터 준비해왔는데 제사장 앞에 제물이 검사 맡을 때 자기가 가져온 것을 퇴짜를 놓으면 그 양은 제물로 드릴 수 없고 또 다른 제물을 준비해야 하니 이중적인 고충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좀 비싸게 하더라도 성전 근처에서 이미 검증된 양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경우를 위해 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14:24-26에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참 간편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유월절에 어느 양을 바칠까, 어떻게 양을 기를까, 어떻게 운반할까 하고 제사를 생각하고 제물을 생각했지만, 세월이 지나다보니까 사람들의 그 편의주의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부근에서 양을 구입하게 되었고, 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양을 팔아먹을 궁리를 하고, 그를 통해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하는 유월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 의도는 먼 곳에 오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한다는 선한 뜻에서 성전 가까이에서 제물을 팔도록 허용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물을 팔아서 많은 이득을 챙기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이 때 한철 장사를 잘해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장사꾼과 제사장들의 마음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고, 하나님의 전인 성전이 세상의 시장 바닥처럼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니 절기만 되면 짐승을 파는 장사꾼들은 대제사장에게 뇌물을 주며 로비를 했고 대제사장은 돈을 받고는 그들이 성전 뜰까지 들어와서 장사하는 것에 눈을 감아준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야단법석이지만 그곳에는 기도소리대신 물건 흥정하는 소리로, 찬양소리 대신 양이나 소의 울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완전히 성전이 장사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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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들의 마음이 처음부터 그렇게 변질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 정성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융통성이라고 할까요 꾀라고 할까요 그런 것이 생긴 것입니다. 이젠 순수함은 사라지고 인본주의 적인 꾀에 빠지자 예배의  진정성은 빠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의 뜨거운 마음이 죽을 때 까지 계속되어야 하는데 순간 영적 긴장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 중심자체가 무너져 내립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 성령  충만 받고 헌신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출8,10장에 나오는 바로의 행동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모습과 똑 같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면서 타협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는 애굽을 떠나지 말고 예배를 드리려거든 여기서 예배드려라 고 했습니다.(출8:25)

둘째는 너희가 광야에서 희생을 드리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고 또 타협합니다.

이 말은 예배는 드리더라도 예배에 깊이 빠지지 말고 대충 드려라, 신앙생활은 하되 적당히 체면을 유지하면서 믿으라, 예수께 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10장에 보면 바로는 또다시 타협합니다.  


셋째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긴 드리되 너희 남정만 가라는 것입니다.(출10:10-11) 

갈려면 너 혼자 가라.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믿어라 ...다른 가족들은 애굽에 그대로 놓고 가라는 것이지요. 


네 번째 유혹은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10:24)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로가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을 자기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힘씁니까?

이 모습이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탄의 자세입니다. 사탄이 광명한 천사처럼 다가와도 사탄은 절대로 그 목적을 바꾸지 않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우리 교회가 타락하는 것,, 성도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다섯번째 이제 못보내겠다 합니다 

마지막은 반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천국의 맛, 말씀의 맛, 기도의 맛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맛보기의 은혜를 주시면서 이제 맛을 봤으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나와 함께 좁은 길로 가자고 하십니다.

“하늘 영광 보여 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주님은 이 맛을 추구하며 살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가짜를 들고 옵니다. 영원하지 않는 것, 일시적인 것, 가짜로 된 세상의 달콤한 맛을 보여주면서 유혹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가 말씀을 통해 천국의 맛을 보고 나면 죄악을 통한 세상의 맛이 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데 ...말씀의 맛이 시들해지면 세상의 맛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준 이 가짜 맛에 길들여진 성도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탄은 어찌하든지 주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을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또 사역자들을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될 세상적인 맛을 들여옵니다. 물질적인 맛을 들여옵니다. 이러한 사탄의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 성전을 회복하시는 예수님

 주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 나라의 진짜 맛을 봐야 할 영적 지도자(대제사장. 바리새인 , 서기관)들이 가짜 맛에 입맛을 다시고 진짜 맛을 잃어버린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15절을 보세요. 주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서 짐승을 파는 이들을 내어 쫓으십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이때 장사꾼들이 예수님께 하는 말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네가 도대체 뭐냐”라는 것입니다. 무슨 자격으로 우리의 장사를 훼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여기 와서 장사하는 줄 아느냐 낼 것을 다 내고 장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권리금을 얼마나 주고 들어왔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사판을 뒤엎으시자 그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돈을 주고 장사를 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이곳에서 아무런 직책도 없는 자가 그러한 일을 하나니 그렇게 할 무슨 권리, 무슨 증명서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요2:19)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

사람들은 네가 무슨 자격과 권리로 이렇게 하느냐라고 묻는데.. 주님은 성전을 헐면 3일후에는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십니다. 눅11:29에도 보면  무리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나 주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상징적인 말씀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무슨 자격이냐고 물으니 내가 성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을 왜 헐라고 하시는 겁니까? 성전이 성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의 마지막 개혁자 요시야왕은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잃어버린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읽으며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왕하 23:1-3) 겉으로는 큰 개혁과 부흥이 일어난 듯이 보입니다. 그때 많은 백성들도 새롭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며 헌신했습니다.

왕하23장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 상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이 헌신이 계속적인 헌신이 되지 못하면 나중에는 믿음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내다 버린 것들을 다시 주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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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 때 예언한 선지자 중에 예레미야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십니다.(렘1:2) 렘7:2-4에 보면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고 전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어디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성전 앞에서 선포합니다. 성전 앞에서 여기가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여기 있기에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신다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성전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떠난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껍데기를 보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예언을 유다인에게 전하라고 하셨을까요?

외적으로 보면 절기와 의식을 회복하고 언약을 갱신하면서 그들에게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성전이 회복되는 것 같은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렘7:8-11에 보면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겉으로는 성전을 멋지게 고치고 모여서 유월절을 지키고 하나님을 잘 믿자고 다짐했지만 

 안으로는 습관적인 예배, 중심이 떠난 외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와서는 거룩한 체 하며 제사하고 분향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지만 밖에서는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습관, 우상숭배는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들이었습니다. 믿음과 삶이 따로 겉도는 이중적인 삶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주님이 우리의 심령의 상태를 다 보고 계십니다. 회개가 빠진 기도,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가인의 예배처럼 받지 않으십니다. 회개가 없고 형식화된 믿음을 가짜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성전의 회복입니다. 보이는 성전보다 보이지 않는 심령성전이 바로 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성전 자체보다 심령성전들이 회복될 수 있다면... 고난을 통해 그들에 있는 불순물이 제거되고 정금 같은 믿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조차도 이방인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우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성전을 보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혹시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자리에 주님이 오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휘두르지는 않으실까요? 

설교하는 이 강대상을 뒤집어엎으시면 너는 왜 내 말은 전하지 않고 네 말만 전하느냐고 탄식하지 않으실까요?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15:8)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내가 신앙연륜이 얼마이고.. 또 무슨 직분을 맡았기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성전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순종하고 있는지.. 우리의 삶과 행동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아니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나의 유익과 체면, 내 자랑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한 성전이 되기 위해 마음속에서 제거되어야 할 무엇은 없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속에 거룩한 예배의 마음은 사라지고 이익과 축복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대한 태도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 듣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계십니까? 혹시 예배를 마지못해 드리는 의무로 여기면서. 민방위 교육이나 받는 것처럼 시간 때우기나 견디는 예배로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와 말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던 우리의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찬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더 깊이 만나야 합니다. 이 만남이 없으면 성전은 성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말씀과 찬양의 소리가 사라지고 양의 울음소리, 돈세는 소리가 많았다면 돈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게 합니다.(요5:25)


여러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밭에 가라지를 뿌려놓습니다. 나도 모르게 불신앙 가라지, 염려와 근심, 불평의 가라지가 자라납니다. 이것들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수시로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길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변질되지 않는 방법은 성령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악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들도 성령님과 늘 교통함으로 성전이 성전 되고, 예배가 예배되는, 성도가 성도되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